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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8. 2022

오픽이 나에게 남긴 것

엄마와 딸이 함께 하는 해외 펜팔

| 많이 읽다 보면 쓰고 싶어 지기에 | 

 오픽 접수 한참 전의 일이었다. 청소와 설거지일랑 미래의 나에게 맡겨두고 책으로 도망치던 어느 날, 책에서 나온 문장들이 내 머리끝까지 차오르더니 찰랑찰랑 거리며 말했다. '우릴 다른 곳으로 좀 옮겨줘 봐.' 우리말이든 영어든 많이 읽다 보면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 보다. 머릿속에서 찰랑거리는 문장들이 외출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어디로 옮겨 줄까?' 하던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일기장이었다. 재작년에 장만해둔 저 일기장 정도면 외출병에 걸린 문장들의 나들이 장소가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가만, 재작년에 장만해둔 일기장에 아직도 쓸 자리가 남아있다니? 사실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새것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우리말로 쓰는 일기도 저런데 영어로 쓰는 일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몇 줄 쓰다가 또 몇 년이 흐른 뒤에나 발견되겠지.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펜팔이었다. 내 편지를 기다리는 친구가 있다면 일기보다는 더 꾸준히 쓰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내 편지를 기다려줄 친구를 어디서 구하지? 게다가 완벽하지 않은 나의 영어 편지를 견뎌줄 너그러운 친구를?' 정보의 바닷속을 헤엄치다 보면 뭐라도 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해외 펜팔을 구할 수 있는 사이트가 몇 개 있었는데 젊은이(?)들 위주로 보이는 곳과 데이트 상대를 구하는 사람들로 버글거리는 곳이 가장 먼저 보였다. 기왕이면 애 키우는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기혼 여성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욕심까지 부리고 있던 나였다. 방문하는 사이트마다 내가 원하는 친구를 찾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영어 편지를 나눌 친구 찾기는 포기하고 작심삼일이라도 영어 일기나 써볼까 하던 중, 나는 Slowly를 발견했다. Slowly는 내가 원하는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곳처럼 보였다. 



| 오픽 시험 전과 후 |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글쓰기 방법을 고민할 때, 펜팔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이미 이런 과거가 있으니 말이다. 과거라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나 좋은 펜팔 사이트를 발견했지만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찰랑거리던 영어 문장들이 막상 멍석을 깔아주니 딴청을 부렸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은 유명 일간지의 칼럼니스트 수준인데 실제로 써놓은 문장은 보잘것이 없었다. 그나마도 좀 길게 써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무릇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은 자꾸 미루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를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오픽 시험 준비 기간을 거쳐 시험 응시까지 마쳤다. 시험은 억지로라도 연습을 해보게 한다. 오픽 준비를 하는 동안,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바꾸는 연습을 피할 수 없었다. 덕분에 처음 펜팔 사이트에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조금 더 연습된 상태로 영어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픽 공부가 내 영어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는 말은 아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준비 기간에 실력이 늘어봤자 얼마나 늘겠는가. 그 기간 동안의 가장 큰 배움이란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 말은 하겠지'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문장도 막상 말하려 들면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걸 깨닫고 또 깨닫는 과정은 말하는 연습을 하고 또 하라고 등 떠미는 과정과 다를 바 없었다.  


 말할 수 있는 문장을 쓰기는 쉽다. 쓸 수 있는 문장을 말하기란 시간이 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쓸 수 없는 문장보다는 말하기 쉽다. 쓰는 연습은 말하는 연습을 도와주고, 말하는 연습은 쓰는 연습을 도와줄 것 같았다. 오픽 시험을 치며 알게 된 부족함은 결국 계속된 연습을 통해 채울 수밖에 없고, 그 연습의 과정에 펜팔이 들어올 수 있다면 나는 이 재미난 경험을 아이에게도 나누어주고 싶었다.



| 오픽이 나에게 남긴 것 | 

 요즘 나는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엄마인 러시아 친구, 외동딸을 키우는 엄마인 트리니다드 토바고 친구와 영어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러시아 친구의 영어는 모국어가 아닌데도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궁금한 수준이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친구는 영어가 모국어이다. 그녀들은 내 요청에 따라 각자의 아이에게 한국인 친구와 이메일을 주고받을 기회가 있는데 해보겠냐고 물었고, 그 결과 아이들끼리도 영어 메일을 주고받고 있다. 아이가 보낸 첫 이메일에는 'Your mom gave my mom your e-mail address. (너네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네 메일 주소를 알려줬어)'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Ava에게 말해주려고 준비했지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 친구들에게 하고 있다.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 이야기만 요구했던 Ava와 달리 이 친구들과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Ava를 보며 이야기할 때는 내 말소리에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리는 모니터 속 막대가 바닥에 머물지 않도록 잔뜩 신경을 써야 했지만 이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은 그런 부담과 긴장이 없다. Ava가 우리나라의 날씨를 물었을 땐 실수하지 않는 것에만 신경 썼다면 이 친구들에게 요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다 끌어온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Ava보다 이 친구들이 훨씬 더 좋다. 


 그렇다고 Ava에게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는 말로 상처 줄 생각은 없다. Ava는 분명히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Ava가 아니었다면 머릿속에서만 활개 치는 문장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연습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더 열심히 연습해서 AL까지 받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IH를 받은 덕분에 조금 더 부지런히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나. 이 친구들과 영어 편지를 주고받기까지는 Ava의 공이 컸다. 이들과 나눈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그 이야기 중 일부를 Ava에게 해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어쩌면 나는 다시 Ava와 약속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78,100원이라는 장벽을 넘고 Ava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정말 올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그날이 온다면 나는 Ava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너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내 영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그러니 이제 AL을 내놓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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