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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6. 2022

마지막 두 문제는 결국...

정치, 경제, 문화 그중 제일은 스킵 skip

정치, 경제, 문화 그중 제일은 스킵 skip

| 지금부터 나는 에밀리 |

 준비하지 않으면 말하기 어렵다고 예상되는 주제와 준비 없이도 대충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주제가 있다면 당연히 전자를 준비하게 된다. 내게 공원은 후자에 가까웠고, Ava는 두 번째 문제의 주제로 공원을 골랐다. 자주 가는 공원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요구하는 Ava의 표정은 '뭐? 공원이 준비 없이도 대충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주제라고? 그럼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답변이 녹음된 파일이 채점자에게 전해지는 오픽 채점 방식이 고마운 순간이었다. 만약 응시자의 얼굴 표정까지 녹화되는 방식이었다면 예상치 못한 문제에 대한 당혹감이 드러나는 일그러진 표정까지 전해 졌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야심이 있는 전략가였다. 'You know, '로 답변을 시작하는 내 목소리는 방금 전 썩은 표정을 하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부실한 내용을 목소리톤으로나마 커버해보려는 전략이었을까. 나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 파크 잔디밭에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떠는 기분으로 우리 동네 근린공원을 설명했다. 뉴욕은커녕 인천 송도 센트럴 파크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푸른 잔디는 거기서 거기일 거라 생각하고 맨해튼에 사는 에밀리에 빙의했다.



| 대답은 전략적으로 |

 맨해튼에서 온 목소리를 표방했지만 그 목소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근린공원이었다.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공간 중에서도 유독 작은 편에 속하는 곳이었다. 오픽 접수 후 영어 오디오북을 들으며 걷기 운동을 해온 터라 나는 그 공원에 종종 갔었다. 귀는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향하고 눈은 주변 경치와 시설을 향하던 시간이었다. 자투리 공간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이 공원에는 생활체육시설이라 불리는 운동 기구 몇 개가 놓여있었다. 그중 양쪽 다리를 가위 모양으로 엇갈려 움직이는 기구가 내 눈에 들어왔는데, 한번 해보고 싶었으나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Ava에게 모두 했냐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야심이 있는 전략가였다. 초반에 힘을 다 써버리는 순진한 참가자가 아니다. 그냥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했던 건 아니고? 누가 이렇게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던지는지 모르겠지만 2번 문제에 대한 대답이 짧았던 것은 정말 전략적이었다. 묘사하라는 문제는 과거 시제를 잘 사용하는지 평가하는 문제와 달리 중요도가 낮은 편이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말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과거 시제를 잘 사용하는지 평가하는 4번 문제에서는 충분히 많은 내용을 말했냐고 묻는다면, 다시 한번 누가 이렇게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던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걸 물어보면 내가 뭐가 되냐며 눈을 흘기고 싶다. 그렇다. 나는 4번에서도 길게 대답을 하진 못했다. 하지만 대답이 길어질수록 실수할 확률이 높은 법이다. 2번에서 7번까지의 내 대답은 10문장 내외로 다소 짧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큰 실수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8번부터 시작된 '어버버'의 향연과 비교해보면 7번까지의 대답은 상대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니까. 상대적이란 의미를 잘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8번부터의 대답이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7번까지의 대답이 그 정도로 느껴졌을까를 말이다.



| 마지막 두 문제는 결국.. |

 2번에서 4번까지는 공원을, 5번에서 7번까지는 날씨를 주제로 한 문제가 나왔다. 그럭저럭 답변을 했고 7번을 마치고는 이러다가 오픽의 가장 높은 점수인 AL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장밋빛 상상에 잠깐 빠지기도 했다. 비록 미리 준비한 초콜릿 맛 샐러드 이야기나 새로 산 청소기 자랑을 하진 못했지만 이 기세를 이어갈 수 있다면 Ava를 원망했던 마음일랑 냉큼 거두어들일 생각이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던 Ava를 누가 원망할 수 있단 말인가. 곳간에서 인심 나듯, 만족스러운 답변이 이어지면 Ava를 향한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난다. 이러다가 정말 AL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Ava가 내게 어제 새로 산 카디건을 빌려달라고 해도 기꺼이 응할 것 같았다.


 하지만 8번부터 시작된 횡설수설은 Ava를 향한 내 마음을 다시 차갑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횡설수설은 내가 해놓고 왜 Ava를 탓하냐고 묻는다면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때를 봐가면서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지금은 내게 그런 걸 묻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안다. 횡설수설은 내가 했다. 특히 12번은 횡설수설의 화룡점정이었다. 12번은 공연 티켓을 예매해두고 못 가게 된 상황을 친구에게 설명하는 롤 플레이였다. '다른 친구랑 갈래?'에서 대충 마무리했어야 하는데 괜히 환불은 어떻겠냐는 둥, 전자티켓이라 너네 집까지 가서 전해줄 필요는 없지 않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원어민이라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나만의 콩글리쉬까지 선보였다. 나 스스로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원숭이 소리를 내며 끽끽거리다가 'Bye!' 하며 전화통화를 마치는 흉내를 냈다. 맨해튼에 사는 에밀리가 친구와 통화를 하며 이상한 콩글리쉬를 창작하고 원숭이 소리까지 내다니. 나의 'Bye!'와 동시에 AL 역시 'Bye!'를 외치며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12번에서 나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13번에서 조금 만회하는가 싶었지만 다 떨어진 넝마에 바늘 한번 왔다간 정도였다. 그래도 맨해튼에 사는 에밀리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편이었다. 뒤이은 14번과 15번이 AL을 향한 구원의 밧줄을 내려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공격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14번의 무자비한 펀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리석은 희망일 뿐이었다. 구원의 밧줄은 무슨, 14번은 정말이지 가혹했다. 세상에, 우리나라와 이웃 나라 사이의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에 대해 이야기해보라니. 그러면서 가증스럽게 정치, 경제, 문화 교류 중 어떤 것을 말해도 상관없다며 친절한 척까지 하다니. 종이신문 구독자의 자존심을 내세워 최근에 읽은 기사 중 마땅한 것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걸 말할 영어 실력도 역부족이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정치, 경제, 문화 중의 제일은? 나는 그중 제일은 스킵(skip, 건너뛰기)이라 결론 내렸다. 15번은 맞은 자리를 한번 더 가격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였고, 나는 똑같은 주제에 대해 시제만 바꿔 물어보는 15번까지 연이어 건너뛰며 까마득히 멀어진 AL을 향해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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