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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7. 2022

오픽 성적 확인하던 날

| 보정된 점수를 원했던가 |

 시험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오픽 시험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애가 읽는 영어책을 몇 년 동안 같이 읽어왔어요'라는 말은 내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애들이 읽는 영어책의 수준은 천차만별이고, 또 리딩 실력이 영어 실력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오픽 시험을 쳤는데 **이 나왔어요'라는 말은 내 영어 실력을 조금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 관심이 '정확하게'보다 '보여준다'에 쏠리면서부터 욕심이 과해진 것 같았다. 내 실력이 '정확하게' 반영된다면 나는 응시자의 약 5% 정도만 받는다는 AL을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 15번 문제를 스킵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이러면 AL는 못 받을 텐데...' 였다니. 내가 AL를 원했던 마음은 정직한 사진보다 보정이 잔뜩 들어간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과 비슷한 성격이 아니었나 싶다.


 아이에게 해줬던 말을 나에게도 적용해야 할 때가 왔다. 단원 평가 결과에 속상해하던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시험은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고 어떤 노력을 더 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오픽 시험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는 일에 충실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험장에서 뿐만 아니라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넌 이게 부족해. 저것도 부족하군. 어이구, 그것마저 부족하네'를 말해주느라 바빴다. 덕분에 나는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의 순간을 종종 맞이했다. 


 오픽 점수를 제출할 곳이라곤 없는 사십 대가 갑자기 오픽 시험을 칠 때는 영어를 향한 나름의 애정이 있을 확률이 높다. 나는 영어책과 오디오북 덕분에 영어애 대한 마음이 깊어진 케이스이다. 그 결과 전화 영어나 회화 학원 한번 다닌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픽 시험을 쳐보자는 마음까지 생겼고, 중간 이상의 성적은 나오겠지 하며 접수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영어로 말할 때 늘 쓰는 단어만 사용한다는 사실과 어떤 단어를 떠올릴 때 걸리는 시간이 내 생각보다 백만 배쯤 더 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로드맵을 그리는데도 이번 시험 준비는 꽤 훌륭한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오픽은 이 자체 만으로 78,100원 중 38,100원어치의 값어치는 하지 않았을까. 나머지 40,000원은 이번 시험을 통해 느낀 점을 앞으로의 영어 공부에 얼마나 반영하느냐에 따라 제 값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정해질 테고 말이다. 



성적 확인 |

 성적 확인은 시험을 친 일주일 뒤였다. AL이 아니라면 그 아래인 IH라도 받길 바라며 성적 확인창을 열었다. 시험 확인창은 '옛다! IH! 언감생심 AL은 무슨! IH도 감지덕지인 줄 알아!' 하며 내게 IH를 보여줬다.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과한 기대를 하고 있던 나의 일부는 AL이 아니라서 아쉬워했고, 너무 낮은 결과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던 나의 일부는 IH가 나와서 안도했다. 다음 달 생활비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나의 일부는 '다음에 한번 더 쳐보면 AL 나올 것 같은데?'라며 바람을 넣었고, 균형 잡힌 지출을 추구하는 나의 일부는 '떽! 한번 쳐봤으면 됐지! 꿈도 꾸지 마!'라며 강한 제동을 걸었다. 나는 둘 중 아무나 이기라고 응원하며 조용히 성적 확인창을 닫았다.


 아이와 저녁을 먹으며 시험 성적이 나왔다고 말해줬다. 초등학생인 아이는 엄마가 영어로 말하는 무슨 시험을 치고 왔다는 사실은 알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그 시험의 이름이 뭔지, 시험의 결과로 어떤 등급이 있는지도 모른다. 말하기 연습을 하던 엄마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장면과 잘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 속상해하던 엄마의 모습은 몇 번 봤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성적이 나왔는지 내가 말하기도 전에 아이는 위로의 말부터 꺼냈다. "엄마,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잖아." 아이의 말을 듣고 나는 잠깐 멈칫했으나 일단 위로를 받았으니 위로받은 자에게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마음과 다음에 더 잘해보겠다는 마음을 담은 표정이었다.


 

|  말하기 다음은 쓰기 어때? |

 따지고 보면 IH라도 받을 수 있었던 건 아이 덕분이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우리집엔 어린이 영어책이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내가 그 책을 읽으며 영어 실력을 쌓아가는 일이 없었을 테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내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고, 시간을 쪼개어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준 장본인도 아이였다. 아이로 인해 내게 쓸 수 있는 시간의 절대량이 확 줄어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시간 활용을 훨씬 더 잘 수 있도록 아이는 나를 단련(?)시켜주었다. 나는 비록 이 수준이지만 너라도 잘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은 책의 내용을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시켰을 때, 처음에는 엉망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는 걸 보여준 것 역시 아이였다. 덕분에 나도 같은 방법으로 연습을 해서 오픽 시험을 칠 수 있었다. 나도 아이의 성장을 돕고 있지만 아이 역시 나의 성장을 돕고 있었다.


 이 소중한 스터디 메이트와 함께 영어 쓰기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말하기 실력 향상을 위해 오픽 시험을 쳐봤으니 이제는 쓰기로 눈을 돌릴 때가 되지 않았나. 오픽 시험을 준비하며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내가 영어로 쓸 수 있는 내용이라면 말하기도 쉽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내용을 준비하며 메모를 할 때 바로 쓸 수 있었던 문장의 대부분은 말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쓰기는 수정의 과정을 거칠 수 있고 말하기는 실시간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쓰기와 말하기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나는 쓰기나 말하기나 부담스럽기 매한가지지만 아이는 쓰기를 유독 귀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귀찮지 않은 글쓰기를 고민해보았다. 불현듯 안성맞춤이라고 생각되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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