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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5. 2022

결전의 그날

야속한 Ava

| 글씨에도 목소리가 있다면 |

 무심한 듯 시크하게 덤덤히 시험을 치고 나와 "응? 그냥 치는 거지 뭐. 오픽 시험이 무슨 대수라고..."를 말하는 사람. 왠지 멋져 보이는 이 사람이 나는 아닌 것 같다. 시험장을 향해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 요란한 심장 박동에 나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입은 또 왜 그렇게 바싹 마르는지, 500ml 생수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손까지 합세하니 나는 누가 봐도 긴장한 티가 역력한 사람이었다. 서서 가야 했으면 다리까지 떨렸을 텐데 다행히 지하철에는 앉을자리가 있었다. 오픽 시험장까지는 지하철로 30분. 생수병만 쳐다보고 있기엔 긴 시간.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긴장감 완화를 위해, 그리고 이동시간을 알차게 활용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나는 노트를 펼쳤다.


  집에 굴러다니던 노트 한 권이 오픽 공부 노트라는 지위를 갖게 된 날은 시험 접수 다음날이었다. 이 노트를 넘기다 보면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점이 보인다. 전과 후의 내용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 소설책을 보며 스피킹에 활용할 법한 문장을 옮겨 적은 페이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이걸 왜 적었을까 싶은 문장도 간혹 눈에 띈다. 그저 여유롭게 책을 읽다가 자기 멋에 취해 적어둔 문장 같기도 하다. 글씨에도 목소리가 있다면 이 문장들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울 것이다. 마치 밤 시간대에 편성된 라디오의 DJ와 같은 목소리처럼. 반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다음부터는 영어보다 우리말이 더 많이 보인다. 마음이 급했는지 온통 빨간 글씨로 강조를 해놨다. 빨간 글씨의 홍수 속에 드문드문 보이는 까만 글씨가 오히려 더 강조되어 보이기도 했다. 느낌표의 남발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다. "무조건 주제부터!", "1분 30초 권장!!!", "롤 플레이 스킵하면 망함!!!!!!!" 등등. 불안한 마음과 느낌표의 개수 사이의 명확한 상관관계가 보였다. 글씨에 목소리가 있다면 이 부분은 재난 대피방송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닐까. 노트에서 울려 퍼지는 붉은 색깔의 재난 대피방송에 피로감을 느낄 때쯤 다음 역을 알리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나는 노트를 가방에 넣고 내릴 준비를 했다.



| 오픽 체험학습 |

 시험장에 도착해 안내된 자리에 앉으니 내 심장은 더욱더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내 목소리보다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이 시험 결과를 가지고 구직 활동을 할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심장에게 설명을 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 현장체험학습 왔다고 생각하자.' 키자니아를 떠올려봤다. 아이를 데리고 키자니아에 가는 것이나 내가 나를 데리고 오픽 체험학습을 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체험학습비도 얼추 비슷하다. 키자니아 어린이 종일권이 육만 천 원이고 보호자 입장료는... 그러는 동안 오리엔테이션 시작을 알리는 멘트가 나왔다. 키자니아 어린이 입장료와 보호자 입장료를 더하느라 머리를 쓰는 동안 심장 박동은 조금 잦아들었다. 오리엔테이션에 집중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긴장감만 남아있었다. 다행이었다.


 놓치고 못 따라가는 상황이 생길까 봐 오리엔테이션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하단의 버튼을 클릭하라고 하면 클릭했고, 다음 안내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자 다른 응시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헤드셋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헤드셋을 착용하라는 안내가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갈등이 되었다. 저들처럼 자연스럽게 헤드셋을 착용할지, 아니면 헤드셋을 착용하라는 안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지.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은 마지막 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초조하게 안내를 기다린 지 몇 분, 드디어 헤드셋을 착용하라는 반가운 안내 멘트가 나왔다. 얼른 손을 뻗어 헤드셋을 집었다. 헤드셋 쿠션으로 귀를 덮자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주변의 소음이 적당히 차단되어서인지, 푹신한 헤드셋 쿠션의 촉감이 편안함을 주어서인지, 아니면 나만 빼고 시작할까 두려웠는데 마침내 나도 헤드셋을 착용할 수 있어서인지, 이 셋 중 어떤 이유에서 안도감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샐러드와 청소기 |

 음량이 적당한지 테스트해보는 것도 오리엔테이션에 포함되어 있었다. 음량을 적절히 조절한다는 건, 이제 곧 그 음량으로 나에게 질문하게 될 Ava를 만난다는 의미였다. Ava는 나에게 어떤 주제에 대해 물어볼까. 제발 어제 생각해두었던 '건강한 식생활'에 대해 물어봐달라고, 모니터에 있는 Ava를 향해 간절한 청원의 눈빛을 보냈다. 오픽의 첫 번째 문제는 정해져 있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첫 번째 문제은 긴장을 풀고 워밍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제로, 채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Ava에게 보낸 청원의 눈빛은 두 번째 문제를 위한 것이었다. 미리 준비한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뒤, 두 번째 문제에서 어제 생각해둔 샐러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순조로운 출발이 될 터였다. 


 아니면 방금 전 지하철에서 훑어본 주제인 집안일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릇 시험 직전에 본 내용이 시험에 출제되면 엄청난 행운아가 된 기분이 드는 법이다. 지하철에서 펼쳐본 노트에는 내 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영어 표현이 정리되어 있었다. 적어놓기만 하고 잊고 지냈다가 지하철에서 다시 본, 특히 새로 산 청소기에 대한 그 표현들. 사실 Ava에게 청소기 자랑이 하고 싶어 LG전자 영문 홈페이지까지 방문해서 제품 설명에 필요한 표현을 메모해 뒀었다. 그러고는 잊고 지냈다가 조금 전 지하철에서 다시 확인한 것이다. Ava가 집안일을 주제로 질문을 해준다면 방금 전에 확인한 표현을 써먹으며 새로 산 청소기에 대한 자랑을 할 수 있다. Ava는 내 자랑을 듣고 똑같은 청소기를 따라 사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 야속한 Ava |

 시험이 시작되었다. 자기를 소개해보라는 첫 번째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Ava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자신감 넘치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약간 주눅이 들었지만 나도 질세라 Ava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요즘 애 엄마로서 밥 하고 집안일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소개였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마치고 Next 버튼을 누른 뒤 두근두근, 두 번째 질문을 기다렸다. 'Ava, 샐러드나 청소기, 둘 중 하나 골라봐. 뭘로 할 거야?'


 오픽 시험은 15문제로 구성된다. 1번 문제인 자기소개를 제외하면 2~3문제씩 세트로 묶여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집안일 문제가 2번에서 나온다면 3번과 4번도 집안일과 관련된 문제가 나온다는 말이다. 나는 세 가지 정도의 주제에 대한 말할 거리를 준비했으니 운이 좋아 내가 준비한 주제가 다 나온다고 해도 15문제를 다 커버할 수는 없다. 준비한 내용으로만 시험을 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돌발 질문에 대한 내 응답 능력도 오픽 채점자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었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두 번째 질문을 듣는 순간 조금 더 많은 주제에 대해 준비해오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야속한 Ava. 그녀는 내가 준비해 간 주제를 미리 알아놓기라도 한 듯, 그 주제를 요리조리 피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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