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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3. 2022

시험 전날은 갑자기 다른 할 일이 쏟아지는 법

책상 정리, 베란다 청소, 만화책 읽기...

| 조건 반사 |

 응시료가 환불되는 취소기간이 지나고 오픽 시험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픽 홈페이지에는 시험일 2일 전 23시 59분 59초까지만 응시료가 환불된다는 내용이 붉은 글씨로 적혀있다. 강조된 붉은 글씨를 보니, 이제는 취소할 꿈도 꾸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가 들리는 듯했다. 네, 취소 안 할게요. 안 한다고요. 응시하면 되잖아요. 그러면서 슬금슬금 책상 정리를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조건 반사급이 아닐까 싶다. 레몬을 보면 침이 고이는 현상과 같다. '내일이 시험'이라는 자극에 따른 '책상 정리' 반응을 그 외 무엇으로 설명하랴.


 그런데 어째 이번 자극에 따른 반응은 책상 정리로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갑자기 베란다 청소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시급한 일로 여겨졌다. 분명 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베란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베란다 바닥에 있는 먼지가 무서운 속도로 자가 증식을 하여 거실까지 범람하면 어쩌려고 한가하게 오픽 공부나 하고 있는단 말인가. 모든 일에는 다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나는 오픽 공부보다 훨씬 더 급한 일임이 분명한 베란다 청소에 기꺼이 내 시간을 갖다 바쳤다.


 책상 정리에 이어 베란다 청소까지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젠 뭘 해야 할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앞에 앉았으면 공부를 해야지 왜 주위를 둘러보는가. 공부보다 더 시급한 일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꿍꿍이를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도 되는 건지, 이런 내 모습을 누가 봤다면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장에 어떤 책이 있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책장에는 아이의 영어책이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린이 독자를 위해 영어권 국가에서 출판된 이 책들은 자기들이 한국에 사는 어느 사십 대 여성의 영어 실력 향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인사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하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너희들 덕분에 오픽 시험까지 접수할 수 있었어. 고마워. 응. 시험은 내일이야.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냐고? 어... 그게, 그러니까... 방금 펼친 이 만화책만 다 읽고 공부하면 안 될까?'



| 대성통곡 |

 라면을 향한 '한 젓가락만 먹을게'는 한 젓가락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한 권만 읽고 공부할게'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책보다는 그래픽 노블이라 불리길 원하는 El Deafo를 빠르게 해치운 뒤 나는 슬그머니 다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아용 영어 그림책이었다. 한 페이지에 한 문장이 겨우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의 그림책은 작년에 싹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몇 권이 남아있었다. 글자만 읽으려 들면 1분도 안 되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버릴 수 있는 그림책. 하지만 아이와 함께 읽으면 세월아 네월아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는 길이 구만리인 그림책. 그런 그림책을 보고 있으니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던 시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구본을 보고 있는 아이 옆으로 그림책이 펼쳐져 있는 장면. 어디로 샐지 모르는 그림책 여행 중 그날은 지구본을 들여다보는 시간까지 필요했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지구본에서 우리나라 국토면적을 확인한 날이었다. 그 무렵 아이에게는 자기가 다니는 유치원이 가장 좋은 유치원이었고, 우리 동네 놀이터가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는? 당연히 우리나라였다. 가장 좋은 나라에 기대되는 국토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은 없으나 분명한 건 지구본에서 확인한 우리나라의 크기가 아이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잘못 알려줬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재차 여기가 정말 우리나라가 맞냐고 확인을 하던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렇게 작은 나라가 우리나라일 리가 없다는 듯, 아이는 자꾸만 러시아 쪽을 흘깃거렸다. 그 후 느닷없이 이어진 대성통곡.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가 말했다. "우리나라도 이만큼 컸으면 좋겠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땅이 좁다고 슬퍼하는 유치원생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조금 작긴 해도 우리나라도 참 좋은 나라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 엄마도 우리나라 규모가 좀 아쉽긴 해. 특히 우리말을 쓰는 인구의 규모를 생각하면 참 아쉽단 말이지.'



| 드디어 내일 |

 책상 정리부터 베란다 청소, 만화책 읽기, 옛 기억 소환까지.. 시험공부를 피하기 위한 노력이 참으로 가상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말을 쓰는 인구의 규모가 아쉽다는 생각이라니,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한결같다고 할 수 있겠다.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0.6%가 우리말인데 비해 영어는 60.9%나 차지한다는 기사를 읽었던 순간, 우리말로 된 코딩 강좌보다 영어로 된 코딩 강좌가 백만 배쯤 많다는 걸 알게 되었던 순간 등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동하는 순간들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러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계속해서 영어 공부에 시간과 마음을 내는 게 아닐까. 단, 오픽 시험 하루 전날만 빼고.


 시험날 쓰겠다고 새로운 표현을 외워봤자 입에 익지 않은 표현이 입 밖으로 나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알고 있는 표현이나 잘 써보자는 마음으로 서너 가지 주제에 대한 할 말 정도만 정리해두었다. 건강한 음식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샐러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되, 샐러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으니 '초콜릿 맛이 나는 샐러드가 있으면 좋겠다' 정도의 헛소리를 섞어보자는 계획을 세우는 식이었다. 예상 가능한 모든 주제에 대해 할 말을 생각해두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서너 가지 주제만 생각해둔 채 나머지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초콜릿 맛이 나는 샐러드를 상상하다 보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시험을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된 탓도 있다. 역시 초콜릿은 훌륭하다. 내일 시험장으로 가는 길에 초콜릿을 사서 부적처럼 품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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