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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19. 2022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경양식 말고 두괄식

| 딱 들킨 기분 |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입에서 영어로 된 말이 나올 때 스스로 감탄을 하게 된다. 특히 그 말이 단어 나부랭이가 아니라 주어 동사를 갖춘 엄연한 문장이라면 더더욱. 만약 그런 문장이 연달아 두세 번 나오기라도 한다면 자아도취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 고작 세 문장을 말했을 뿐이지만 마음만큼은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를 마친 연사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이건 좀 과장이 심한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오픽 강의를 검색하고 있던 내가 수줍게 손을 들 것이다. 


 아는 단어, 모르는 단어 할 것 없이 모조리 끌어모아 얼기설기 엮어서 말해놓고 그것도 문장이랍시고 스스로 감탄하고 있던 차였다. 말할 수 있는 표현이 지나치게 한정적이므로 일단 내뱉을 수 있는 말을 몽땅 다 드러내며 연습을 했다. 몇 안 되는 아는 표현을 마구잡이로 늘어놓다 보니 횡설수설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길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오픽 준비자가 나 말고도 여럿 있었는지, 유튜브의 오픽노잼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전해주셨다. 제발 자기가 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취해서 주제랑 상관없는 말 좀 늘어놓지 말라고. 차라리 짧게 대답하는 게 낫지, 자기가 아는 표현 써먹고 싶어서 괜히 횡설수설하다가는 점수가 낮게 나온다고 말이다. 딱 들킨 기분이었다. 내가 바로 그랬으니까. 아는 표현을 써먹기 위해 크게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려고 했으니까 말이다.



|  경양식 돈가스 |

 오픽 시험은 응시자가 현재 시제뿐만 아니라 과거 시제도 잘 사용하는지를 평가하기 위에 추억을 소환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대해 말해보라든지, 어릴 때 갔던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라든지 하면서 말이다. Ava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하나도 관심이 없지만 다짜고짜 어릴 때 살던 동네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그게 그녀의 일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나온다면, 나 역시 Ava와 나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지만 최선을 다해 대답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살던 우리 동네를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연습을 위해 "엄....."하고 일단 시작을 해봤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의 시간. 길어도 너무 길었다. 내일 아침 날 밝을 때까지 그다음 말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엄....."을 거두어들였다. 누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히 머쓱해하며 헛기침을 해댔다. 말을 시작하기 위한 시동 걸기로 "엄...."을 한 것이 아니라 기침의 시작이 "엄...."이었다며 꾸며대기라도 하듯.


 영어로 말하기는 뒤로 미뤄두고 Ava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까를 생각하며 어릴 때 살던 동네를 떠올려보았다. 연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릴 때 살던 아파트의 주차장, 놀이터를 지나면 보이던 상가 건물, 그리고 그 상가에 있던 경양식 돈가스집. 그 돈가스집에 누구랑 갔었는지를 떠올리고 있을 즈음, 오픽노잼 선생님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제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 섞어서 하지 마세요! 이야기하려는 주제를 처음부터 말하고, 그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가야 깔끔하게 들린다고요!" 


 유튜브에 살고 계신 오픽 선생님은 두괄식으로 답변하는 게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를 하셨다. 기왕 치는 시험, 좋은 점수를 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나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했다. 답변을 할 때 중심 내용부터 먼저 말하면 두괄식이 된다. 처음엔 그 정도쯤이야 싶었다. 노래 한 곡 구성지게 부르면서 시작하라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순서만 신경 쓰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연습을 해보니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두괄식이 성립하려면 중심 내용에 관련된 내용이 뒤따라야 한다. 두어 문장이 전부인 답변에서는 두괄식이니 미괄식이니 하는 구성을 아예 찾아볼 수 없으니까. 결국 두괄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여러 문장으로 이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면? 일단 말할 수 있는 내용을 모조리 다 말해서 조금이라도 답변의 길이를 늘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

 문득 아이가 말을 배우던 즈음이 떠올랐다. 제법 여러 문장을 이어서 말할 수 있던 때였다. 그 무렵 아이는 눈앞에 보이는 장난감 기차 이야기를 하나 싶다가 어느새 공 이야기를 하고 있고, 공놀이 이야기를 하다가도 뜬금없이 먹을 것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야기 중 잠깐 삼천포로 빠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삼천포 1, 삼천포 2, 삼천포 3 등을 경유하다가 원래의 목적지를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린지 당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니까. 삼천포에 백만 번쯤 빠지는 이야기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내 답변을 듣게 될 Ava에게 미안해졌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Ava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흐뭇하게 들어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눈곱만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분량을 늘이기 위해 삼천포행을 불사하겠다? 갓 말을 배운 아이처럼 어눌하게 말할 거면서?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인지했다면 삼천포행은 막아야 했다. 사랑의 감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 말 배우는 아이와 같은 횡설수설을 내 앞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Ava는 '도대체 뭔 소리야?'라는 물음표를 머릿속에 한가득 띄우고 낮은 점수에 체크를 할 테다. 


 길게 말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다소, 아니 상당히 짧은 답변이 될 테지만 하나의 중심 내용으로 정리될 수 있는 내용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너 살 무렵의 삼천포행은 귀엽지만 사십 대 중반의 횡설수설은 절대 귀엽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겠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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