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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17. 2022

오픽도 결국은 시험

영어 공부와 전략 공부 사이에서

| 시험 일주일 전 |

 오픽 점수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영어 스피킹 연습을 위한 동기로 삼아보겠다며 거금 78,100원을 지출한 나. 그렇다면 지금쯤 열심히 스피킹 연습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양심이 있다면 그래야 한다. 그런데 내 양심은 어디 갔을까. 평소 사탕 껍질 하나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 걸 보며 어느 정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나 자신을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시험 접수 후 지금까지 스피킹 연습 시간의 누적 합계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시험까지는 오늘부터 일주일. 새롭게 각오를 다지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다. 지금부터는 열심히 해보리라 마음을 먹고 바로 '오픽 모의고사'를 검색해보았다. 유튜브 씨가 오픽 모의고사 썸네일을 내보였다.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무언가를 꺼내놓는 듯한 유튜브 씨의 모습이 평소 저돌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이거 안 보면 낭패!', '믿을 수가 없어요!' 등의 익숙한 제목이 아니었다. 하긴 오픽 모의고사를 오픽 모의고사라고 말하지 그 외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호들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썸네일들은 마치 '왜 이제야 날 찾았니. 난 오래전부터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느낌이었다.



|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그거란 말이야? |

 내가 연습을 안 해서 그렇지, 연습만 하면 잘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들려오는 문제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아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해서라도 멋진 답변을 해보리라. 모르긴 해도 Ava가 내 답변을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백설공주는 독사과를 먹으려고 했어요'를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잭은 거인의 거위를 훔쳤어요' 까지도. 그런데 내 귀에 들리는 이 단어는 도대체 무엇인가. Recycle? 재활용? Ava는 내게 분리수거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질문을 다 듣고 난 나는 Ava에게 되묻고 싶어졌다. Ava, 정녕 그게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인가요?


 어떤 종류의 문제가 나오는지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내가 어느 정도까지 답할 수 있는지 스스로 진단해보기 위해 모의고사를 찾아본 것이었다.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모의고사는 문제를 말한 뒤 답변을 위한 시간을 준다. 그래서 35분이 넘는 영상이라도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모의고사를 보고 있는 사람이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도록 만들어둔 영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공백을 채울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모의고사 영상을 10분도 지나지 않아 꺼버렸다. 사실 10분까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나에겐 분리수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영어 실력도, 이야깃거리도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 드디어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

 오픽은 응시자가 시험 전 설문에 체크한 내용으로만 문제를 내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예상 가능한 문제로만 구성된 쉬운(?) 시험이 될 테다. 무작위로 선택된 문제도 함께 출제해야 응시자의 전반적인 말하기 실력을 평가할 수 있을 테지. 그래, 그 의도는 알겠다. 너무나도 잘 알겠다. 하지만 분리수거에 관한 에피소드라니, 도대체 누가 분리수거를 하며 겪었던 일을 가슴속에 품고 산단 말인가. 물구나무를 서서 분리수거를 한 적도 없고 분리수거장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적도 없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리수거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그제야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픽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시험이 아니다. 아무 준비도 없던 사람에게 갑자기 어떤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우리말로 대답하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한가하게 영어 동화책 오디오북이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조급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떤 시험이든 시험을 치기로 했으면 시험 유형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하거늘, 무슨 배짱으로 한가하게 영어 동화책이나 읽고 있었을까. 오픽 점수를 어딘가에 제출할 필요는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기왕 치는 시험,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드디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오픽 책을 펼쳤다. 시험 치기 전에 설마 한 번은 보겠지 하고 빌려둔 책이었다. 대출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 반납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니 더욱더 마음이 급해졌다.



| 영어 공부와 전략 공부 사이에서 |

 책을 보다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을 볼수록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절대 저 정도 수준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시험 이틀 전까지는 취소가 된다던데 그냥 취소해버릴까 싶었다. 시험 응시의 목적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영어원서 읽기를 하다보니 영어 말하기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말하기 연습을 위한 동기를 만들기 위해 오픽 접수를 했다. 그렇다면 그냥 남은 일주일간 말하기 연습 시간을 늘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너무 형편없는 점수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기 시작하자 영어 공부가 아닌 시험 점수를 위한 전략 공부에 눈이 갔다. 그러니까 무릎까지 오는 실력을 허벅지까지 올려볼 생각은 하지 않고, 비록 내 실력은 무릎이지만 어깨 정도 되는 결과가 나오는 꼼수가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게 된 것이다. 모의고사 영상은 10분도 되지 않아 꺼버린 주제에 나는 왜 오픽 점수를 잘 받은 사람들의 후기 영상을 그렇게나 오래 보고 있는 걸까.


 "Bad Kitty Takes the Test"라는 제목의 어린이 영어책에는 고양이 자질 시험에 응시하는 고양이들이 나온다. 고양이들은 이 시험에 붙어야 고양이 자격을 유지할 수 있고, 떨어지면 고양이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 풍자와 유머가 매력적인 이 책에는 괜찮은 고양이가 되기 위한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시험에 패스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고양이가 '#2연필'을 사용하는 것이 시험에 매우 중요하다며 강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던 나와 오픽 시험 점수를 높여줄 '#2연필'을 찾고 있는 나는 동일 인물이다. 애초에 내가 왜 시험을 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사실 내게 시험 결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좋은 점수를 받고 싶었다. D-7. 영어 공부와 오픽 점수를 높이기 위한 전략 공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하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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