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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Sep 29. 2022

미드 vs 영어 원서

because 밖에 모르던 사람이 since를 쓸 때 일어나는 일

|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은 관계로 |

 D-15. 접수한 오픽 시험 날짜까지 보름이 남았다. 컵에 물이 반쯤 차 있을 때 '반밖에 남지 않았다'라고 말하면 부정적인 시각, '반이나 남았다'라고 하면 긍정적인 시각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럼 나는 '보름 밖에 남지 않았다'와 '보름이나 남았다'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긍정적인 사고가 심장마비나 뇌졸중 등의 심혈관계 질환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긍정적인 사람일수록 심장 건강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뇌졸중에 걸리기는 싫은 나는 '보름이나 남았다'를 선택하기로 했다.


 보름이나 남은 상태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자주 출제된다고 알려진 주제를 알아보고 대답 연습을 해보는 건 미래의 나에게 미뤄두자. 왜 진작 예상 문제에 답하는 연습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궁시렁댈 것이 분명한 미래의 나에게 살짝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제 읽던 책을 계속 이어서 읽기로 한다. 미래의 내가 달려와서 내 멱살을 잡고 '78100원은 버리는 셈 칠 거야? 지금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겠다고?'를 외치며 길길이 날뛰면 이런 협상안 정도는 꺼낼 생각이 있다. 영어 원서를 읽으며 내 경험을 말할 때 쓸 수 있는 문장을 만나면 소리 내어 읽어보겠다고, 그럼 오픽과 전혀 상관없는 책 읽기는 아니니 괜찮지 않겠냐고 말이다.


| 미드(미국 드라마) vs 영어 원서 |

 영어 공부법으로 미드 쉐도잉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내에서 공부했지만 유창하게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같이 미드를 보면서 영어가 늘었다고 했다. 그들처럼 쏼라쏼라 영어를 말하고 싶었던 나도 미드 쉐도잉에 도전한 적이 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쉐도잉, 즉 들으면서 바로 따라 말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게다가 미드는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장면,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장면, 미묘한 표정 연기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장면 등 대사가 없는 시간도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 드라마 감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던 나는 낭비되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다른 미드를 골라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미드 쉐도잉은 내게 적합한 영어 공부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이 뒤따랐다. 짬짬이 하기가 어려웠고, 한번 시작하면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드는 시간 빈곤자인 워킹맘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 무렵 아이는 하루 30분 청독을 하고 있었다.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그 소리에 맞추어 영어책을 읽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이를 위해 내가 한 일은 아이가 재미있게 읽을 법한 책을 찾아보고 책과 오디오북이 떨어지지 않도록 구비해두는 것이었다.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몇 년만 이렇게 해주면 적어도 '아, 나도 영어 잘하고 싶다'를 되뇌는 나와 같은 40대가 되진 않겠지 싶었다. 6학년인 지금은 오디오북을 플레이하고 책을 찾아서 읽는 일련의 과정을 혼자 하지만 저학년이었을 땐 모든 과정에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내가 옆에 바짝 붙어 앉아있어야만 했다. 엄마가 읽어주는 게 아니라 오디오북이 읽어주고 있더라도 아이는 어깨를 밀착시키고 자기와 같은 페이지에 시선을 두고 있는 엄마를 필요로 했다. 덕분에 나는 오롯이 아이의 청독 과정을 함께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드라마에서는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면 그만인 장면을 오디오북에서는 모두 다 말로 묘사를 해준다는 사실을. 테이블 저쪽 끝에 혼자 앉아있는 주인공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He was sitting all by himself, way down at the end of the table."이라는 문장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을. 내가 영어 공부를 한다면 미드보다 책을 활용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


| because 밖에 모르던 사람이 since를 쓸 때 벌어지는 일 |

 어깨를 바짝 붙이고 앉아 함께 청독을 하는 날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2년이 지날 무렵부터는 아이가 혼자 알아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가 읽을 책을 고르는 동시에 내가 읽을 영어책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리딩 실력은 어린이용 책 중에서도 쉬운 편에 속하는 책만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몇 페이지 읽다가 조금 어렵다 싶으면 그냥 덮어버리고 다른 책을 다시 펼치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이가 읽을 책을 마련하며 수준에 맞는 영어책을 찾는 일에는 꽤 숙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 책을 찾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어려운 책을 붙들고 끙끙대기보다 쉽게 읽히는 책을 여러 권 읽는 방법을 썼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올해, 'since'가 일을 저질러버렸다. '~때문에'의 의미로 쓰인 'since'였다. 'since'가 '~때문에'의 뜻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걸 학교 다닐 때 배우긴 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때문에'가 영어로 뭐냐고 묻는다면 다른 단어는 떠올릴 틈도 없이 바로 'because'라고 대답할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 '때문에'는 'because'였고, 'because'는 '때문에'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책을 읽다가 '때문에'의 의미로 쓰인 'since' 자리에 은근슬쩍 'because'를 넣어봤더니 세상에나,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때문에'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뼛속까지 '때문에'인 'because'가 들어갔는데 어색하게 느껴지다니! 그리고 그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나라니! since와 because가 어깨동무를 하고 앉아서 내게 이런 말을 건네는 듯했다. '훗! 이제 우리 차이를 좀 알겠어? 어느 세월에 늘겠나 싶었는데, 그래도 늘긴 늘었네!'


 그렇다. 영어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오픽 시험을 쳐보겠다며 접수를 하게 된 배경에는 'since'와 'because'가 있었다. 이 둘이 내 등을 떠밀었다. 작년이었다면 'since'를 떠올리지 못했을 자리에 당당히 'since'를 넣고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자, 이 두 녀석이 쏼라쏼라를 향한 내 마음에 기름을 부으며 오픽 시험 한번 쳐보라고 등을 떠민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78100원이 떨어져서 접수를 한 게 아니다. because 밖에 모르던 사람이 since를 쓸 수 있게 되면 자기가 영어를 좀 잘하게 된 것 같다는 착각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겁도 없이 오픽 접수를 하는 사고를 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since'와 'because'를 찾아 책으로 도망친다. 도대체 내 입이 왜 이렇게 안 떨어지는 거냐며, 시험날까지 이러면 어쩔 거냐며, 시험 접수하라고 등 떠민 너네 둘이 이 사태를 책임져야 한다고 따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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