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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Sep 25. 2022

오픽의 숨은 기능

귀하는 여가 활동으로 주로 무엇을 하십니까

| Ava와 첫 대면 |

 오픽 접수 후 며칠이 지났다. 며칠간 나의 하루 일과를 돌아보면, 24시간 중 대략 92%는 오픽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7.5%는 상관이 있길 바라는 일을 하며, 0.5%는 도움이 되리라 확신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보냈다. '도대체 24시간(1440분)의 0.5%는 몇 시간, 아니 몇 분이야?' 하며 막 계산을 시작한 분들께 부탁드린다. 부디 계산을 참아달라고. 아직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라는 구질구질한 변명을 덧붙이며 말이다.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에 속아주는 척하며 '그럼 지금까지는 그 0.5%의 시간에 뭘 했어?'라고 묻는 아량을 보여주신다면, Ava와 안면을 트는 시간을 보냈다는 대답을 꺼낼 것이다.


평가 진행자 Ava를 만나다

 오픽이 어떤 시험인지 알아보기 위해 오픽 홈페이지에 들어간 나는 모든 항목을 클릭해볼 기세로 이것저것 읽어보고 있었다. 구직활동을 할 것도 아니면서 어떤 기업에서 오픽을 활용하는지도 읽어봤다. 8~19세에 속하지도 않으면서 오픽 루키까지 클릭해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러니 맨날 시간이 없지!' 하며 퍼뜩 정신을 차리고 스크롤을 내리다가 샘플 테스트를 발견했다. 샘플 테스트라니, 이거야말로 오픽이 어떤 시험인지 알아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무작정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그녀, Ava 말이다.


| 오픽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험인가 |

 Ava는 머리손질을 어떻게 할까 궁금해하며 Next 버튼을 클릭하니 Backgraound Survey가 나왔다. '현재 귀하는 어느 분야에 종사하고 계십니까?'부터 시작하여 여가 활동, 취미나 관심사 등을 묻는 설문이었다. 설문에 대한 응답을 기초로 개인별 문항이 출제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총 12개 이상의 항목을 선택하라는데 12개는커녕 절반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가장 먼저 나오는 여가 활동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귀하는 여가 활동으로 주로 무엇을 하십니까' 아래에는 '영화보기, 클럽/나이트클럽 가기, 공연 보기, 콘서트 보기, 박물관 가기, 공원 가기, 캠핑하기, 해변가기, 스포츠 관람, 주거 개선'이 있었는데 이 중 두 개 이상을 선택하는 게 내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생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것이 클럽, 캠핑, 스포츠 관람이며 공원 가기를 제외한 나머지도 거의 연중행사에 가깝다. 갑자기 무미건조한 내 삶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오픽 설문이 '이제야 알겠느냐! 네가 얼마나 재미없게 살고 있는지! 오픽 공부 따윈 집어치우고 빨리 해변으로 나가서 놀아라!'라는 메시지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설문 항목을 만들 때 여가활동을 통한 국민 행복 증진을 꾀하는 세력이 참여한 건 아닐까. 소비 증진을 통해 경제 활성화를 시키고 싶은 세력까지 함께 말이다.


 이러다가는 오픽 시험장에서 Ava를 붙들고 신세한탄을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리타분한지 모르겠다면서, 우리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자고 말할 분위기인데... 아, 맞다! 나는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지.


| 오픽의 숨은 기능 |

 여가활동, 취미나 관심사 설문을 진행하며 내 인생 전반에 걸친 반성을 했는데 그 뒤엔 이보다 더 가혹한 질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귀하는 주로 어떤 운동을 즐기십니까?'였다. 오픽의 배후 세력 중 국민건강증진에 관심이 많은 부서가 만든 문항이 분명했다. 이건 건강검진 문진표에서 볼 수 있는 항목과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건강검진에서는 운동 시간을 묻고, 오픽 설문에서는 종목을 묻고 있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오픽의 숨은 기능인 자기 성찰에 집중했다. 농구, 야구/소프트볼, 축구, 미식축구, 하키, 크리켓, 골프, 배구,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수영, 자전거, 스키/스노우보드, 아이스 스케이트, 조깅, 걷기, 요가, 하이킹/트레킹, 낚시, 헬스 중 내가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건 '걷기'였으나 '풉! 장 보러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걷기라고 할 수 있어?'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나를 위해 오픽 측에서 자비롭게 마련해준 선택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음'이었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음'에 클릭을 하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란 말할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여가, 취미, 운동에 관해 내가 Ava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너무나도 빈약했다. 영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이야기하라고 해도 몇 마디 못할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시험장에서 애꿎은 Ava에게 신세한탄 및 시비 걸기를 하는 진상을 부리면 어쩌나. 아직 우린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로는 신세한탄을 해본 적이 없는데.


 오픽 시험에서 말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라고 생각하신다면 아직 내 이야기를 끝까지 읽지 않은 탓이다. 나는 Ava에게 이야기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위에서 말한 '오픽과 상관이 있길 바라며 보낸 7.5%'의 절반이 바로 이 시간이다. '걷기'만큼이라도 당당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영어 동화 오디오북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꽂고 열심히 걸었다. Ava가 주로 어디를 걸었냐고 물으면 설명할 수 있도록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오픽 접수가 영어뿐만 아니라 운동까지 시켜주다니, Ava가 걷기에 대해 물으면 네 덕분에 열심히 걸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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