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와장창이었던 첫 번째 접종
조금씩 자기 영역을 넓혀가던 여명이는 이제 책장 맨 위칸까지 쉽게 오르내릴 수 있었고, 점점 더 높은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운동신경을 보면 쓸데없는 걱정일 것 같았지만, 나는 높은 곳에 오르내릴 때 여명이가 다칠까봐 걱정이 됐다. 어떻게든 높은 곳에 오르려는 여명이와 올라가는 길목을 막으려는 나는 날마다 눈치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한 번 올라가지 말라고 한 곳에는 올라가지 않는 착한 고양이였다.
어느덧 처음 동물병원에 다녀온지 보름이 지나 1차 접종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처음 체중을 쟀을 때 500g이 될까 말까 해서 선생님과 나는 보름 뒤로 접종 날짜를 정해도 될지 고민했다. 체중이 800g은 돼야 접종을 할 수 있는데, 아기 고양이들은 보통 일주일에 100g 정도 는다고 했다. 좀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걱정은 됐지만, 눈과 피부가 얼마나 아물었는지도 궁금해서 일단 동물병원에 가기로 했다.
처음에 병원갈 때는 기운도 없고 정신도 없어서 얌전했던 여명이가 이번에는 달랐다. 작은 슬링백 안에서 얼마나 몸부림을 치는지, KTX를 타고 가면서 봐도 가방 안에 살아있는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병원까지 가는 10분 정도가 10년 같았다. 나는 그동안 하찮게 여겼던 여명이의 발톱이 가방을 찢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식은땀이 났다.
그렇게 가방 안에서 폭군처럼 굴던 여명이는 동물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얘가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기절한 건 아닌가 놀라서 가방 안에 손을 넣어봤을 정도였다. 여명이도 동물병원이 낯설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뭐냐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댔다가 어머 되게 사람 이름 같네요! 라는 말을 듣고서야 부랴부랴 여명이 이름을 댔다. 창피함에 얼굴이 좀 벌게졌다. 그쵸...제 이름은 되게 사람 이름 같죠...제가 사람이니까. 우여곡절 끝에 여명이 이름이 불리고 나는 약간, 여명이는 아주 많이 긴장해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여명이 상태에 대해 선생님과 문답을 주고받은 뒤에 가방에서 여명이를 꺼냈다. 보름 만에 여명이를 보신 선생님의 첫마디는 “아이고...배가...”였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니 다리나 얼굴에는 살이 별로 없는데 배는 빵빵했다. 왜 지금까지 눈치를 못 챘나 싶었다. 800g 안되면 주사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을까요? 등의 이야기를 30초 전까지 하고 있었는데. 체중계에 여명이를 올린 선생님이 응? 하시더니 다시 한번 쟀다. 체중이 모자라냐고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선생님이 ‘여명이 체중이...’라며 머뭇거리셨다. 내가 여명이가 사료를 잘 안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고저쩌고 변명을 막 하려던 참이었다. “여명이 체중이... 980g이네요.”
여명이는 그날 처음으로 접종을 했다. 내가 좀 민망해했더니 선생님은 이제 정상 체중이라는 둥 안 먹는 것보다 낫다는 둥 혼신의 실드를 쳐주셨다. 건강 상태는 아주 좋으며, 이제 태어난 지 2달 정도 된 것 같다고도 덧붙이셨다. 그래 체중 좀 많이 늘었으면 어때,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면 최고지. 근데 여명이 너 혹시 누나 없을 때 뭐 시켜먹는 건 아니지? 보름 만에 500g이나 늘었...아니야 건강하면 됐다.
보름 뒤에 2차 접종을 하기로 하고 병원을 나서려는데 선생님이 뭔가를 주셔서 봤더니 여명이 병원 수첩이었다. 접종 일자와 심장 사상충 약 바르러 오는 날이 체크되어 있었는데, 여명이 이름 아래 보호자 이름으로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내가 여명이를 잘 돌보고 있는 걸까. 이왕이면 베테랑 집사, 좀 더 여유 있는 환경의 누군가가 여명이를 발견했으면 더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여명이를 데려오고 나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미안하다. 집이 좁은 것도 미안하고, 동물은 처음인 초보 집사인 것도 미안하고, 여명이가 재채기만 해도 미안하다. 미안한 게 많은 집사지만 그래도 진짜 가족 만날 때까지는 복닥복닥 지지고 볶으면서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