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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Aug 25. 2020

분리불안 있어요, 쟤 말고 제가요

차가운 고양이에게 질척거리는 하루하루

나에게 제대로 콩깍지가 씐 탓도 있겠지만, 7월이 끝나갈 무렵 여명이는 정말 착한 고양이였다. 나는 여명이가 뭔가를 보채거나 심한 장난을 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낑 소리 한 번 내는 걸 못 봐서 동물병원에 갔을 때 혹시 얘가 목소리를 못 내는지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그날 체온을 잴 때 아주 가냘프게 낑낑거리는 걸 듣고 얘도 소리를 내긴 내는구나 싶었다. 병원에서 발톱을 깎을 때도, 몸무게를 잴 때도 너무 얌전해서 얘가 고양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8월 말인 지금, 한 달 전 여명이의 이야기를 하자니 다른 고양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개월령 무렵의 여명이는 차가운 도시 남자였다. 먹을 것이든 사람이든 장난감이든, 그게 뭐였든 간에 심각하게 집착하거나 보채는 법이 없었다. 딱 한 가지, 못하게 막아도 기를 쓰고 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스크래쳐로 쓰는 정도였을까. 내가 좋아하는 책만 굳이 박박 긁는 건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져도 좋아하는 책은 팔지 말라는 여명이의 깊은 배려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초월 해석을 할 정도로 저 무렵의 여명이는 정말 착하고 순했다. 내가 회사에 가려고 나설 때도 한 번 쓱 보고는 자기 할 일을 했다. 내가 조금 서운할 정도로 시크한 뽀시래기였다.

“누나 출근 준비하니? 그러고 가니?”

고양이는 한없이 시크하고 쿨한데, 사람이 그렇지 못했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집에 혼자 있을 여명이를 걱정했다. 혹시라도 물그릇을 와장창 엎어서 퇴근 시간까지 목말라서 쩔쩔매면 어떡하지? 실수로 높은데 올라갔다가 못 내려와서 겁먹으면 어떡하지? 스크래쳐로 쓰다가 책에 젤리라도 베면 어쩌지? 등등 하찮은 걱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물론 저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걱정거리가 대체로 사소했던 이유는 강박적으로 여명이가 다칠만한 물건을 다 정리했기 때문이다. 온종일 걱정하다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여명이는 항상 내 침대 위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자다가 부은 얼굴로 일어나, ‘왔니?’하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쳐다봤다. 하루 종일 분리불안을 겪은 건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혼자서 잘 있어준 여명이한테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매번 집에 돌아오면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여명이를 보니 좀 안쓰러웠다. 고양이들은 수직 공간이 중요하다는데 내 방에서 제일 높은 건 책장이었고, 거기서 잠을 자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누워있기는 했지만. 여명이 짐을 많이 늘릴 생각이 없었는데 수직 공간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날부터 적당한 크기에 가격도 적당한 캣타워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다. 내가 캣타워까지 들이는 게 맞을지를 하루 종일 고민했는데, 그날 저녁 퇴근하고 나서 또 침대에 있는 여명이를 보고는 바로 주문했다.

7월이 시작될 무렵만 해도 내가 캣타워를 내 방에서 조립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뚱땅뚱땅 뭔가를 조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여명이가 어슬렁어슬렁 구경하러 왔다. 애착 바지 위에 앉아서 잠깐 구경하더니 질렸는지 잠이 들었다. 누나 캣타워 완성하면 기립 박수 쳐야지 지금 자면 어떡하냐며 호통쳤는데, 여명이가 자서 다행이었다. 한참을 잔 여명이가 다시 부스스 일어날 때까지도 나는 캣타워를 완성하지 못했다. 다시 한참이 지나 드디어 캣타워를 완성하고 나서 의기양양하게 여명이한테 보여줬다. 여명이는 냄새를 잠깐 킁킁 맡더니 책장으로 가서 책 위에 불편하게 누웠다. 누나 지금 캣타워 거의 2시간 조립했다만?! 캣타워를 보면서 책을 긁는 모습은 내가 여명이를 만난 이래 가장 얄미웠다.

캣타워에 넣어주면 후다닥 도망가던 첫날과 3일 후의 모습

애착 바지와 수세미, 장난감을 모두 동원해서 여명이를 캣타워로 유인해도 잠깐 오는가 싶더니 바로 후다닥 도망을 갔다. 고양이는 캣타워를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고양이를 글로만 배운 나로서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산 캣타워가 너무 작아서 싫은가? 더 크면 둘 데가 없는데...라는 고민이 깊어졌다. 풀 죽은 내가 짠했는지, 아니면 새로운 물건에 대한 경계가 풀렸는지 다행히 3일 뒤에 여명이는 캣타워에 올라가 줬다. 처음 한 발이 어려웠을 뿐인지, 여명이는 곧 맨 꼭대기층에서 잠을 잘 정도로 금방 적응했다. 다음날부터 여명이가 캣타워 맨 꼭대기층에서 자다가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하나 더 추가되어 내 분리불안은 강화되었지만, 여명이가 잘 써줘서 그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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