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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Aug 30. 2020

낮에는 힐링, 밤에는 킬링

아무래도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다

세상 시크하던 여명이는 한 달을 함께 지내면서 다른 고양이처럼 성격이 변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나를 흘끗 보고 눈인사만 한 뒤에 다시 자기 할 일을 하던 시크한 여명이는 이제 넉살 좋은 고양이가 되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느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더라도 부은 얼굴로 부스스하게 현관까지 마중을 나왔다. 내가 손을 씻는 동안도 야옹야옹 수다를 떨면서 내 다리에 머리와 몸을 부비며 인사를 했다. 내가 안아 들고 쓰다듬어 주면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나 싶을 정도로 크게 고롱고롱했다. 여명이는 이제 내 집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완전히 마음을 연 것 같았다.

누나 이거 내 애착바지 같은데? 내놔!

여명이는 나와 내 공간에 완전히 적응했고, 점점 애교 많고 붙임성 좋은 고양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여명이를 꼭 좋은 가족에게 입양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인이자 1인 가구인 나로서는,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애교 많은 고양이를 하루에 아무리 적어도 10시간은 혼자 둬야 한다는 게 점점 더 미안해졌다. 같은 1인 가구라도 이미 고양이를 잘 돌보고 있는 누군가의 둘째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 얼굴도 많이 예뻐졌으니까 입양 홍보를 시작하면 곧 좋은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누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명이는 내가 출근하기 전과 퇴근한 후에 애교를 부리느라 바빴다. 출근 전에는 내가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내 무릎에 앉아서 자기 좀 보라고 야옹야옹했고, 내가 가방을 들고 현관 쪽으로 가면 다 체념한 표정으로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혼자 두는 게 미안해서 내가 괜히 오버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매일 출근할 때마다 너무 미안했다. 날마다 퇴근하고 나서 더 많이 놀아주고 더 많이 안아줘야지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원래도 약속이 많지 않은 집순이였는데, 여명이가 집에 오고 나서부터는 귀가 시간도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애썼다. 칼 같이 정해진 시간에 오던 내가 가끔 평소보다 늦으면 여명이는 잔소리를 한참이나 했다.

내가 퇴근하면 곧장 오랬지!!(실제 상황)

낮과 저녁에는 이렇게 애틋하고 미안하던 우리 사이가 밤이 되면 좀 달랐다. 내가 없는 낮 시간에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여명이는 해가 져도 기운이 넘쳤다. 밤에 더 늦게 자고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는 정도면 괜찮을 텐데, 여명이가 원하는 임보 누나의 기상 시각은 새벽 2시였다. 11시부터 잠이 들어서 나는 2시에 일단 1차로 일어나야 했다. 인간이 얕은 잠과 깊은 잠을 반복하는 패턴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처럼 내가 일단 3시간쯤 잤다 싶으면 귀신 같이 깨우는 이과 고양이였다. 매일매일 2시 무렵에 깨우니까 이쯤 되면 얘가 시계를 볼 줄 아는 게 아닌가 싶었다. 2시부터 잠깐 놀다가 내가 다시 잠이 들었다 싶으면, 불량배가 시비 거는 것처럼 앞발로 내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그렇게 비몽사몽 5시가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좀 졸아도 너그럽게 봐줬다. 그러다가 내가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면 하품을 쩍쩍하면서 내 옆에 털썩 누웠다. 항상 알람을 끌 때면 내 팔에 엎드려서 자는 여명이의 얄미운 정수리를 봐야 했다.

알람 끄다가 실수로 건드리면 눈으로 욕하는 여명이

나는 체력이 좋은 편이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에도 아무렇지 않았고, 여행지에서 3만보 이상을 날마다 걸어도 멀쩡했다. 그런데 여명이의 2시 캠프가 시작된 후로 오랜만에 혓바늘이 돋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요즘 피곤하냐고 묻기 시작했고, 사정을 아는 친한 사람들은 어제 또 여명이가 새벽에 깨웠냐고 물었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책과 커뮤니티를 찾아서 일단 쉬운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자기 전에 사냥 놀이를 좀 오래, 아주 격렬하게 해서 기운을 빼놓기로 했다. 샤워를 다시 해야 할 정도로 신나게 놀아줘도 내 기운만 빠졌는지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여명이는 나를 깨웠다. 다른 방법으로 여명이가 나를 깨우는 걸 무시하고 자는 척을 했더니 여명이는 우리 건물 사람들을 다 깨울 기세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새벽 2시에 시작되는 여명이의 파티에 나는 또 참여해야 했다. 아니, 아기 고양이들은 20시간씩 잔다면서요...얘 사실은 얼굴만 앳된 어른 고양이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름을 여명이라고 지어서 얘가 이렇게 새벽에 날뛰는 건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조신, 얌전 이런 이름으로 지을걸...

내 흉 봤냐옹!!!!

언제까지 이렇게 크레이지 파티광과 살아야 하나 암담할 무렵에 나는 커뮤니티에서 글을 하나 봤다. 시도 때도 없이 뛰어놀고 설치는 것도 아기 고양이 시절에만 그렇고 어른이 되면 그때가 그리울 정도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줄줄이 동조하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그러니까 여명이도 길어야 1년 정도 이런다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좋은 가족에게 입양을 갈 여명이는 나랑 사는 동안은 계속 저럴 테고, 혹시라도 좀 늦게 가족을 찾게 된다면 그들은 이런 여명이의 진상 잔치를 겪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점잖은 여명이를 못 보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여명이가 더 점잖아지기 전에 가족을 찾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기 고양이 시절은 정말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갈 것이고, 지금 이 애교 많은 모습을 여명이의 가족이 못 본다고 생각하니 그건 또 그거대로 아쉬웠기 때문에. 여명이의 여러 모습을 다 볼 수 있는 적당한 시기에 좋은 가족이 짠 나타나 주면 좋겠다. 그리고 여명이가 나를 3시간만 더 재워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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