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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Sep 10. 2020

호불호 분명한 고양이의 첫 하악질

불호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혹시 목소리를 못 내는 게 아닌지 동물병원에 확인을 해야 할 정도로 처음 한 달 동안 여명이는 조용한 고양이였다. 아깽이들이 주체가 안될 정도로 활발하고 시끄럽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얘가 유독 비실비실한 건가 계속 걱정했는데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적응을 좀 마친 여명이는 애교도 많았고 말도 많았다. 좁은 방 안에서 여명이가 엄청난 속도로 우다다를 할 때마다, 나는 만춘이가 치타를 낳은 게 아닌가 싶었다. 이 무렵부터는 사진을 찍으면 10장 중에 7장은 잔상만 찍혔다. 어쩔 수 없이 깨어있는 사진보다 자는 사진이 더 많아졌다.

10장을 찍으면 7장은 이 모양...

수다스러운 고양이가 되긴 했지만, 행동에 비해 목소리는 정말 작았다. 내가 싱크대 앞에 서있으면 간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 제일 소리가 컸는데, 그나마도 물소리에 묻혀서 하나도 안 들릴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여명이가 소심한 야옹이로 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름값은 해야 하니까 배에 힘주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잔소리를 했었다. 내 말을 지나치게 잘 듣는 여명이는 머지않아 득음을 한 것처럼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요즘 새벽 2시에 여명이의 판소리 파티가 시작되면 나는 저때의 나를 매우 치고 싶어 진다.

목청은 점점 좋아지는데 8월이 다 가도록 여명이가 하악질을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불편한 내색을 할 때는 있었다. 고양이라면 응당 싫어하는 그런 것들을 여명이도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청소기나 드라이어를 돌리면 여명이는 내 방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도망가서 눈으로 심한 욕을 했다. 그리고 발톱을 깎을 때면 솜방망이로 내 얼굴을 밀기도 하고 몸을 비틀기도 하면서 언짢은 내색을 했다. 그중에 제일 싫어하는 건 귀청소였는데, 한 번 하면 적어도 30분은 삐져있었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도망가거나 하는 정도였고, 싫은 게 있어도 하악질은 한 적이 없었다. 드센 임보 누나 때문에 얘가 싫은 게 있어도 제대로 표현을 못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나는 또 마음이 짠했다.

귀청소를 하고 단단히 삐진 여명이

돌이켜보니 대체로 일을 그르치는 건 저 ‘아닌가 싶어서’인 것 같다. 나는 입버릇처럼 여명이에게 싫은 게 있으면 하악질도 하고 좀 그러라고 했는데, 항상 내 입이 방정인 것 같다. 동생 집으로 이사를 한 뒤에, 낯선 집에 적응하는 여명이가 짠해서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쓰려고 했다. 정작 여명이는 당일에도 자기 집처럼 편하게 잤는데도 괜히 누나들이 극성이었다. 어느 날 동생이 청소하려고 청소기를 꺼냈을 때였다. 평소처럼 후다닥 도망갈 줄 알고 퇴로를 뚫어줬는데, 여명이가 꿈쩍도 안 하고 앉아있었다. 얘가 왜 이래? 하면서 그냥 두고 청소를 시작했더니 어디선가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하고 봤더니, 의기양양하게 앉은 여명이가 묘생 첫 하악질을 하고 있었다. 주책바가지 누나들은 우리 고양이가 이제 다 커서 하악질을 한다며 잔치 분위기였다.

드라이어를 보고 하악! 누나도 머리는 말려야지...(울먹)

하악질을 하고 나서 칭찬을 받았다는 걸 알았는지 여명이는 그 뒤로 걸핏하면 하악질을 했다. 청소기 쪽으로 가기만 해도, 드라이어를 꺼내기만 해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서 하악거렸다. 기계에는 신나게 하악질을 하던 여명이는 발톱을 깎거나 귀청소를 할 때는 나한테 칭얼거리기만 했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사람한테는 하악질을 안하는 착한 고양이라며 냥불출 누나들은 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다만 가끔 내가 안 보는 것 같을 때 발톱깎이를 패는 장면은 몇 번 훔쳐봤었다. 발톱깎이를 팡팡 패는 여명이는 정말 하찮지만 귀여웠다.

이제 글로만 봤던 고양이의 특징들을 다 한 번씩은 본 느낌이었다. 꾹꾹이, 우다다, 하악질. 아직 쭙쭙이는 못 봤지만, 그건 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서 아마 영영 못 볼 것 같다. 여명이가 싫어하는 것만 잔뜩 얘기한 것 같지만, 좋아하는 것도 제법 있다. 다만 호불호가 어찌나 분명한지 간식도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면 파묻기 바쁘고, 장난감도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거들떠도 안 본다. 내가 집에 있으면 항상 나한테 찰싹 붙어서 놀거나, 그루밍하거나, 자는 걸 보니 여명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의기양양).

누나가 제일 좋아!(초월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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