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여명 Sep 20. 2020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뭔가가 있다

말 못 하는 여명이의 답답한 하루

동생 집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한 여명이는 무서운 속도로 적응을 마쳤다. 도착한 그 날부터 여명이는 그 집에서 동생보다 더 오래 산 것 같았다. 출근했던 동생이 집에 돌아오면, 여명이는 온갖 기상천외한 곳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와서 동생을 반긴다고 했다. 동생은 퇴근할 때 오늘은 여명이가 어디서 반길까 두근두근하다며, 내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여명이의 대소변 테러가 원인이었던 내 두근두근과는 다른 느낌이겠지만, 어쨌든 두근두근하다니 나도 기뻤다. 하지만 동생은 여명이가 새벽에 파티를 시작하면 당사자인 여명이는 물론이고, 여명이를 맡긴 나까지 제정신인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새벽 내내 시달린 동생이 출근 준비를 시작하면 여명이는 그때부터 꿀잠을 잔다며 세상에 저렇게 얄미운 고양이는 처음이라고 이를 갈았다. 나는 대노한 주상전하 앞에 선 벼슬아치처럼 제발 3주만 참아달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동생이 두 얼굴의 여명이에게 밤낮으로 시달리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전해 듣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언니! 어제 밤중에 여명이가!로 시작되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약한 고양이가 또 무슨 진상을 부렸을까 긴장했다. 분명히 캥거루처럼 날뛰었거나, 옷걸이에 걸린 하늘하늘한 옷을 긁어놨거나, 동생 귓가에 대고 사이렌처럼 울었거나... 아니면 셋 다 했겠지 생각하며 사과할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동생 입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새벽 2시 무렵에 여명이가 침대 헤드에 앉아서, 허공과 동생을 번갈아 보며 운다고 했다. 처음 한 번은 머리맡에서까지 우는 여명이가 정말 가지가지한다 싶어서 화가 났는데, 그게 며칠 반복되니까 무섭기 시작했다고. 내 집에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동생은 무서우니까 당장 오늘부터 자기 집에 와서 자라고 펄펄 뛰었다. 진상 고양이를 맡긴 죄가 엄중하니 나는 군말 없이 가야 했다.

새벽에 난리를 쳐서 동생 꿀잠을 방해했으니 따끔하게 한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갔는데, 며칠 만에 여명이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아니, 고양이가 이렇게 귀여운데 말까지 잘 들어야 해? 고양이가 좀 울 수도 있지! 뛸 수도 있지! 당당하기 짝이 없는 1인1묘 진상 콤비를 한심하게 보고 있던 동생이 그럼 그 귀여운 고양이 다시 데려가라고 해서 나는 다시 석고대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자다가 여명이 우는 소리에 깼더니 정말 침대 헤드에 서서 우리 쪽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시간은 동생 말대로 2시 반. 괜히 소름이 끼쳐서 불을 켜고 울고 있는 여명이를 불러 내려 한바탕 놀아줬다. 놀다 지친 여명이는 꿀잠을 자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고양이 눈에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뭔가가 보이는 걸까. 고양이들이 먼지를 잘 본다는 둥, 그냥 놀아달라고 저러는 거 같다는 둥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나조차도 여명이가 뭔가를 보고 저러는 건가 싶었다. 갑자기 동생 집에서는 공포영화가 시작되었고, 다행히 내가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겁에 질린 동생과 며칠 동안 같이 지낼 수 있었다.

노트북 전원 끄기 대회하면 최소 1등

여명이는 그 후로도 새벽에 자고 있는 우리 머리맡에서 그렇게 울었다. 우리는 침대 헤드가 있는 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불렀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동생의 새벽잠을 깨우기가 미안해서, 재택근무를 하는 내가 여명이의 새벽 통곡을 막았다. 재택이 끝나도 새벽에 이렇게 울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여명이의 통곡은 끝이 났다. 낮잠 자는 여명이 옆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부스스 일어나서 혼자 잠깐 노는가 싶더니 여명이는 통곡의 벽으로 쪼르르 가서 울기 시작했다. 지금 대낮인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여명이가 낮에도 울었다고 얘기하면서 똑똑한 우리 고양이가 그런 비과학적인 이유로 울었을 리 없다고 어필했다. 우리는 용기를 (그리고 힘을) 내서 벽에 바짝 붙은 침대를 들어내 보기로 했다.

침대를 들어내기 전에 매트리스만 들어냈는데도, 지난 며칠 동안 여명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매트리스 아래에는 여명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아지풀이 깔려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아지풀을 가지고 놀다가 여명이는 자기가 꺼낼 수 없는 곳에 그걸 밀어 넣은 것 같았다. 꺼내 보려고 발을 넣을수록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결국 눈에 안 보이는 곳까지 들어가 버렸겠지. 누나들이 놀아주는 저녁 시간에는 잊고 있다가, 놀아주는 사람 없는 새벽이 되면 그제야 자기가 밀어 넣은 장난감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비과학적인 가설 수십 개를 낳았던 여명이의 새벽  통곡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모든 게 밝혀지고 나서 생각하니 새벽 2시는 원래도 여명이가 시끄러운 시간이었다. 누나들이 열정 넘치게 창의적인 헛다리를 짚고 있는 동안 여명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며칠간 공포에 떨었던 기억 때문인지 동생은 예전만큼 여명이가 새벽에 뛰노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이제 안 잃어버릴꺼다옹!!
이전 13화 호불호 분명한 고양이의 첫 하악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