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는 내 눈에만 귀여운 게 아니었다
처음에 여명이를 데려올 때 생각했다. 아기 고양이들은 접종을 3번 한다고 하니, 마지막으로 주사 맞을 때까지는 가족을 만날 수 있게 해주자고. 아마 2달 정도가 걸릴테니 9월 중순쯤일텐데, 그때쯤에는 가족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짓물렀던 눈과 코 주변이 깨끗해지고 나서는 이러다 너무 금방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씐(아직 안 벗겨진 것 같다) 나는 얘가 이렇게 귀여워서 입양 홍보 시작하면 가족 후보들이 너무 많을까봐 걱정했다. 제일 사랑 많이 받으면서 자랄 수 있는 집에 보내주려고 나름 기준도 아주 빡빡하게 세웠었다. 그러나 마지막 접종을 앞둔 9월 중순까지도 입양 문의는 0건이었다. 너 누나한테만 인기 있는 고양인가봐 여명아.
여명이를 데려올 때, 세상 일이 그렇게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긴 했다. 여명이가 입양을 못 간다고 만춘이에게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입양을 못 갈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여명이 임보를 시작하고 나서 100일이 지나도록 입양을 못 가면 그때는 입양 전제 임보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3개월 정도면 귀여운 여명이는 입양을 갈 거라고 생각했고, 혹시 아니라면 입양을 못 가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데리고 있는 고양이가 되지는 않기를 바랐다. 입양 홍보를 하면서 많은 고양이들의 홍보글을 봤다. 금방 가족을 만난 고양이도 있었고, 1년 넘도록 가족을 찾고 있는 고양이도 있었다. 그리고 있을 곳이 여의치 않아 임보처를 전전하는 고양이들도 있었다. 여명이를 처음 만났던 7월에도 지금도 나는 반려동물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가족을 찾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려도 돌봐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건 괜찮지만, 그동안 내내 여명이를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고양이로 대하는 건 서글픈 일이었다. 3개월은 반드시, 꼭 입양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로 1년 정도는 내가 키울 수도 있다고 마음을 가지고 가족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여명이를 입양한다면 그건 여명이를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명이를 다른 집에 보낼 수 없을 만큼 정이 많이 들어서 안 보내는 상황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100일이 다가오니 마음이 복잡하긴하다. 여명이와 나의 100일 기념으로 중성화 수술이라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까무러치게 놀랄테니까 당일까지는 비밀이다. 10월 중하순에는 여명이도 어엿한 5개월령 고양이니까 할 수 있겠지. 여명이 조만간 누나랑 돈까스 먹으러 가자.
3차 접종이 있었던 9월 중순 어느 날, 여명이는 이제 동물병원에서도 제법 의연한 고양이였다. 한 5분 정도. 선생님들은 여명이가 못 본 사이에 너무 많이 컸다며 놀라셨다. 멋진 고양이의 체중은 무려 2.2kg...2달 전 500g이었던 고양이는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3차 접종과 광견병 주사를 제법 의젓하게 맞는 여명이를 보면서 선생님은 이제 주사도 잘 맞는다며 칭찬하셨다. 여명이는 그동안 몸만 큰 게 아닌 모양이었다. 기특한 고양이는 집에 돌아와서 간식을 신나게 먹고, 5시간 넘게 삐져있었다. 기특하지만 뒤끝이 만리장성인 우리 고양이.
여명이가 마지막 주사를 맞은 날은 내 오랜 친구의 생일이었다. 축하 인사 끝에 평범하게 여명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날 저녁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의 친한 친구가 여명이의 이야기를 솔깃하게 듣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친구도 나와 같은 1인 가구지만, 모든 요건이 고양이를 반려하기에 나보다 훨씬 더 적합했다. 심지어 고양이를 6-7년 반려했고, 결혼한 언니가 데려가 반려 중인 그 고양이에게 여전히 깊은 애정을 쏟고 있다고 했다. 우리 여명이에게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싶었다.
여명이가 내 눈에만 귀여운 게 아니었구나. 여명이도 어쩌면 진짜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명이가 낯선 집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입양 문의가 오면 마음이 좀 놓일 줄 알았는데,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마음에 눈물이 펑펑 났다. 여명이를 3주 데리고 있었던 내 동생도 이 소식에 2시간 동안 울었다고 했다. 여명이가 입양을 못 갈까봐 걱정했던 나는 금방 마음을 다 잡았는데, 동생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울에 찍힌 여명이 발자국에도,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온 여명이 화장실 모래 알갱이에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동생의 작은 집이 온통 눈물 지뢰였다. 이쯤 되면 오버하는 건 집안 내력인가 보다.
누나들 눈물을 쏙 빼놓은 여명이의 첫 입양 문의는 싱겁게도 아직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여명이의 첫 가족 후보에게는 아직 마음을 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우리는 천천히 결정하기로 했다. 가족을 들이는 건 당연히 신중하게 생각할 일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여명이 입양을 심사숙고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고민이 길어질 수도 있고, 그 결과가 입양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입양 홍보는 이어가기로 했다. 그게 서로에게 덜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여명이는 어디서 어떤 연말을 맞게 될까. 아직은 모르겠지만 여명이도 나도 지금만큼 행복하면 좋겠다. 요즘도 눈물 버튼 가끔 눌리는 내 동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