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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Jun 21. 2021

어떻게 빠진 털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축하 꽃가루 대신 털과 모래가 날리는 즐거운 생일 파티

고양이의 체온이 사람보다 높다는 걸 여명이를 만나고 나서 처음 알았다. 겨우내 내 옆에 딱 붙어서 자던 따끈따끈한 여명이가 꼭 주머니 난로 같았다. 딱 좋던 그 따뜻함이 뜨거움으로 느껴져서 이제 약간 거리를 두고 자줬으면 싶을 때 봄이 왔다. 이제는 내가 환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도 여명이가 후다닥 이불 속에 들어가서 눈으로 욕을 하거나, 보일러가 들어오는 바닥을 찾아 녹아내리지 않게 되었다. 예년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에어컨 필터를 청소하고, 여름 이불을 꺼내면서 마음보다 몸이 더 따뜻한 고양이와 함께 살 준비를 마쳤다. 여름 준비 말고도 봄에는 중요한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여명이의 생일.

지난여름에 길에서 처음 만난 여명이의 추정 생일은 5월 말이다. 동물병원에서 여명이의 성별을 알려주시면서 태어난 지 한두 달 되었을 거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러면서 여명이의 건강수첩에 추정 생일을 써주셨고 그날이 여명이의 생일이 되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했지만, 사실 여명이를 입양하기로 마음먹고 나서 나는 5월 20일부터 31일 사이의 사주들을 검색했다. 되도록 무병장수하는 사주를 가지는 날을 생일로 정해주고 싶어서. 그런데 검색을 하다가 문득 쓸데없는 일에 기운을 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 동물병원에서 알려준 날짜로 확정했다.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내가 여명이를 잘 돌보면서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면 그렇게 되겠지.

내가 뭐...(건장)

처음에 비실비실하던 여명이는 이제 건장한 청소년 고양이가 되었다. 매달 심장사상충 때문에 동물병원을 방문하면, 몸무게를 볼 때마다 일단 선생님이 아... 하고 짧게 탄식을 하신다. 살짝 불안해진 내가 혹시 체중 조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선생님은 내일모레 방향을 보시면서 일단은 성장기니까 지켜보자고 해주신다. 그러나 이제 더는 성장기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여명이가 첫 생일을 맞으며 성장기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여명이를 임보하면서 다음 봄은 같이 못 보겠다고 서글퍼하던 것도, 이 뽀시래기가 언제 커서 생일파티를 하나 싶었던 것도 다 전생의 기억처럼 아련해질 무렵, 멀게만 느껴지던 여명이의 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고양이 생일은 처음이라서 그냥 좋아하는 간식을 좀 더 챙겨주고,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더 오래 놀아주면 되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래도 첫 생일인데 케이크는 하나 있어야 할까 하고 고양이 생일파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물품들과 후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여명이는 태어나서 처음 맞는 생일인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가'와 '그래도 첫 생일인데' 사이에서 내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람 가족에게도 해준 적 없는 파티 현장이 되고 말았다. 평일이라서 아무도 부를 수가 없어서 둘만의 조촐한 파티가 될 예정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조촐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처음 느낀 건 여명이의 케이크가 도착했을 때였다. 판매 사이트에 분명히 케이크의 크기를 적어두었는데도, 나는 사진 속 케이크의 크기를 눈대중으로 짐작하고 말았다. 그래도 양손 가득 크기는 되겠거니 했던 케이크는 사실 내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설상가상 첫 생일이라서 주문한 케이크용 토퍼는 그 두 배로 더 컸다. 어쩔 수 없이 그 토퍼를 꽂을 만한 사람용 케이크를 사야 했다. 생일상에 케이크만 두 개면 좀 그런가 하고 다른 걸 더 얹기로 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들렀던 도넛 가게에서 구색 맞추기용으로 미니 도넛을 몇 개 샀다. 그러다 문득 어릴 때 엄마가 내 생일에 항상 수수경단을 맞춰주셨던 기억이 나서 집에 가는 길에 경단도 한 팩 샀다.

집에 도착하니 빨리 저녁밥을 내놓으라고 호랑이처럼 우는 여명이한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통사정을 하며, 나는 파티용 커튼을 달았다. 자기 건 줄 알았는지 여명이는 거기에 신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빽빽하던 술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헐렁한 커튼 사이로 벽이 보이기 시작해서 나는 마음이 급했다. 생일상을 차려놓고 나니 여명이 건 하나밖에 없다는 게 보였다. 이래저래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단 주인공 여명이가 잔뜩 신나 보여서 다행이었다. 제발 정면을 보고 사진 한 장만 찍어달라는 내 애원은 모른척했지만, 평소와 다른 이벤트에 신난 여명이 모습을 보니 그제야 나도 좀 뿌듯했다. 그렇지만, 이런 생일파티는 이제 당분간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이 정도 규모는 5년에 한 번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파티보다 선물이 좋은 1살

생일이 되기까지 1년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함께하는 생활에 제법 익숙해졌다. 집사 누나의 생활 패턴을 눈치챈 건지 여명이는 이제 내가 잘 때 같이 잔다. 나보다 세 시간쯤 일찍 일어나서 깨울 때면 우리 부모님이 심어놓은 첩자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예전에 새벽 내내 깨우던 걸 생각하면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우리의 생활 패턴이 이제야 잘 맞기 시작했다. 꾹꾹이 비슷한 것도 못하던 여명이는 이제 어설프게나마 꾹꾹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날파리를 보면 어설픈 채터링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다. 여전히 내 이불을 다 찢어놓을 정도로 신나게 뛰어놀지만, 이제 하지 말라는 걸 (내가 지켜보는 동안은) 참는 법도 배운 것 같다. 그런데 작년과 비교해서 가장 많이 달라진 건 따로 있다. 바로 털.

빗질 3번의 흔적

고양이를 비롯한 털 짐승들이 추워지면 털을 찌운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 찌워놓은 털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환절기가 되면서 나는 그 비밀을 드디어 알았다. 지난겨울에 여명이는 털인지 살인지 모를 것을 잔뜩 찌워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겨우내 찌운 털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기간에 온몸으로 뿜어내며 돌아다녔다. 여명이랑 스치기만 해도 옷이 털 범벅으로 변하는 기적을 매일매일 볼 수 있었다. 고양이 털이 정확히 몇 가닥인지는 모르겠지만, 날마다 이 정도씩 빠지면 여름 끝무렵에는 온몸의 털이 없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의미없을 만큼, 화수분 같이 날마다 새로운 털이 빠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매년 환절기마다 반복될 거라고 생각하니 좀 아득해졌다. 그렇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서 나는 어느덧 어두운 색 옷보다 밝은 색 옷을 더 많이 입기 시작했고, 여름 이불을 하얀색으로 준비했다. 외출 전에는 돌돌이를 사용해 옷에 붙은 털을 떼어내고,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남은 털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러고는 못 산다고 징징거렸지만, 이러고도 살아진다는 걸 날마다 깨닫는 중이다. 아직 내공이 모자라 빠진 털까지는 사랑할 수 없지만 털을 뿜어내는 본체는 마냥 사랑스러우니, 오래오래 털을 날리며 건강하게 같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분명히 오래 털 날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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