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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Jan 09. 2021

우리 집에 해태가 산다

식구가 되어가는 과정

달라진 게 없으니까 아마 모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여명이는 내가 자기 집사가 됐다는 걸 감으로 아는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더 생긴 것 같고, 태도에서 조금 더 당당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 좀 더 자라서 그런 건데 괜히 내가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누나랑 계속 같이 사는 거라고 여명이한테 얘기는 해줬지만 그걸 알아들었을 것 같지는 않고, 알게 모르게 내가 여명이를 대하는 태도에 달라진 점이 있나 싶었다. 그 전에는 여명이를 입양 보낼 생각에, 너무 까탈스럽지 않은 고양이로 키우려고 했다. 다양한 사료와 캔을 주면서 입맛 까다로운 고양이가 되지 않았으면 했고, 화장실도 하루에 두세 번 정도만 치우며 지나치게 깔끔 떠는 고양이로 만들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도 여명이도 서로 너무 정이 푹 들지 않았으면 했다. 결과적으로 이게 완전히 망해버려서 여명이는 이제 나랑 같이 살게 되었다.

나는 문득 여명이와 내 관계를 뭐라고 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몇 가지 말들을 떠올리고 사전에서 뜻을 찾아봤다. 후보는 가족과 식구로 좁혀졌다. 사전적 의미로는 여명이와 나는 가족보다는 식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관계다.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같이하는 여명이와 내 관계에 딱이었다. 가족이라는 말을 붙이자니 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식구라는 말은 마음에 꼭 들었다. 관계에 이름이 붙은 기념으로 나는 식구에게 가장 필요한 걸 선물하기로 했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보다 몸이 부쩍 자란 여명이에게 지금 쓰는 밥그릇 높이가 너무 낮아 보였다. 분명히 두어 달 전만 해도 딱 알맞은 높이로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 여명이가 큰절을 하면서 밥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으로서 여명이한테 조금 더 편하고 예쁜 밥그릇과 물그릇을 사주고 싶었다. 이제 좀 오래 쓸 그릇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신중해져서 내 밥그릇 살 때 보다 더 오래, 더 꼼꼼하게 검색했다. 정말 예쁘고 좋아 보이는 게 많아서 고르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낯설어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여명이는 새로운 밥그릇과 물그릇을 원래 쓰던 그릇처럼 익숙하게 쓰기 시작했다. 은근히 새 거 좋아하는 고양이였다.

밥그릇의 짧은 역사

체격도 그렇지만 태도도 이제는 좀 여유로워졌다. 여전히 치타처럼 온 방을 뛰어다니기는 하지만, 조금 더 조심성이 생겼다. 더 어릴 때는 천방지축으로 여기저기 다 손대고 기어올라가고 난리더니, 이제 올라갈 데와 올라가면 안 되는 데를 구분하는 느낌이었다. 하악질에도 이제 관록이 붙었다. 예전에는 청소기가 눈에 띄기만 해도 하악질을 하고 캣타워 위에서 한 발짝도 안 내려오더니, 이제는 침대까지 내려와서 청소기 구경을 한다. 하악질을 하는 건 내가 청소기 정리를 바로 안 하고 뭔가 다른 일을 할 때다. 청소기를 넣어두려다가 흐트러진 의자 정리를 잠깐 했더니, 해태 같은 얼굴로 하악질을 했다. 이제 원기옥 모으듯이 기운을 모아서 한 번에 빵 터뜨리는 느낌으로 하악질을 하는데, 그게 약간 박력이 있다. 처음으로 청소기가 있는데도 여명이가 캣타워에서 침대로 내려온 날 기념으로 찍으려다가, 잠깐 청소기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고 대노한 여명이 하악질을 봤다.

일단 청소기 치우라옹!!!!!!!

요즘 바깥 날씨가 부쩍 추워져서인지, 여명이의 모친 만춘이 생각이 더 자주 난다. 한 달 넘게 얼굴을 못 봤는데, 나랑 시간이 어긋나서 못 마주치고 있는 건지 다른 어딘가로 떠난 건지.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착 달라붙어서 꿀잠 자는 여명이를 볼 때마다 한 번도 따뜻한 바닥에 누워본 적 없을 만춘이 생각이 나서 괜히 마음이 짠했다. 늘 그랬듯이 누구보다 터프하고 요령 있게 만춘이는 잘 지내고 있을 테지만, 새해 인사할 겸 여명이 소식도 전할 겸 조만간 자주 만나던 편의점 앞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만춘아, 너 아무래도 해태를 낳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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