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향기 Aug 21. 2023

바람이 더 잘 느껴지는 날

왠지 바람이 더 잘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쩌면 멀리 보이는 산에서 내려왔는지도 모를, 어쩌면 저 멀리 누군가의 뺨을 스치고 왔을, 누군가는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손에서 놓쳤을 그 바람이 더 잘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바람이 전해지는 날에는 꼭 누군가의 기분 좋은,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게 된다.


린디는 암과 투병하고 있고, 린디의 남편 피터 역시 피부암으로 얼굴의 삼분의 일은 절개를 해 여기저기 남은 피부가 제자리도 찾지 못한 채 기워져 있다. 린디와 피터를 알고 지낸 지는 삼 년이 되었다. 친구의 친구들인 그들을 식사에 한번 초대했었다. 그 이후 우린 친구가 되었다. 린디와 피터는 암투병 생활에도 지치지 않고 생기가 넘친다. 정원을 늘 예쁘게 가꾸고, 집 곳곳을 수리하고 페인트도 직접 칠하며 활력 있게 생활하고 있다. 피터는 매달 얼굴이 변해가고 있고 곳곳이 절개되어 알아볼 수 없게 변해가고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내가 독감에 걸려 한 달 여를 앓아눕게 되자 그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꽃다발과 카드를 들고 너의 하루에 밝은 기운을 전하러 왔다며 불시에 찾아온 것이다. 그들이 전한 꽃과 카드는 밝은 기운 한 줄기 그 이상이었다. 사람은 사람을 치유한다.


그들은 고통 속에 살았지만 고통 속에 존재한 적이 없고, 고통을 경험했어도 고통을 즐기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린디가 전한 카드에 적힌 'something to brighten someone's day'를 나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독감에서 회복되어 기운을 회복하니, 나도 누군가의 하루를 밝혀줄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멜리사와 로저가 떠올랐다. 로저는 혈액암으로 투병 중이다. 투렛 증후군이 있어 처음 로저를 만났을 때 무척 난처했다. 투렛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온다. 무언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낯선 환경이 되거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을 때 증상은 더 심해진다. 아마도 난 그때 내가 내 생애 들어볼 영어 욕설을 모조리 다 듣게 된 것 같다. 첨엔 두렵고 무서웠지만 로저가 평온을 되찾았을 때 그가 얼마나 유머감 있고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따금 한국 요리를 해다 주기도 했는데, 멜리사는 나의 요리를 좋아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크나큰 축복이다.


얼마 전 로저는 암이 온몸으로 퍼져 림프선 곳곳에까지 암이 퍼졌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었다. 멜리사는 힘들어했고, 로저 역시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치료법을 찾지 못해 힘들어했다. 우리 가족은 린디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꽃과 카드를 들고 그들을 방문했다. 이전보다 더 쇠약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픈 와중에도 그들은 고양이 한 마리과 강아지 한 마리를 돌보고 있었는데 16년을 함께한 고양이였다. 여전히 귀여운 아기 같은 할머니 고양이는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듯 한 손을 내밀었다. 멜리사와 로저가 16년 동안 품은 사랑이 전해져 왔다. 집 한쪽에 자그만 디지털 피아노가 있었는데 아무도 치지 않아 먼지가 쌓여 있었다. 먼지를 닦아내고 난 그들을 위해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해 주었다. 곡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자 그들은 울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우는 거야. 이건 좋은 눈물이야. 행복한 눈물."

멜리사와 로저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가장 보람 있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린디가 나에게 건넨 꽃다발은 이렇게 이 둘에게 전해졌고, 또 우리가 전한 사랑 역시 멜리사와 로저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다. 릴레이를 하듯 말이다.


로저는 같이 따라간 아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펜을 선물로 주었다. 마치 아들에게 '이번 주자는 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들도 이 릴레이의 주자로 뛰어주길 바란다. 아들에게 이런 바람이 잘 전해지길 바란다.


바람이 산을 타고 내려와 누군가의 뺨에, 누군가의 손에, 누군가의 머리카락에 닿듯, 우리의 바람들도 그렇게 바람처럼 전해진다. 그리고 바람이 더 잘 느껴지는 어느 날, 누군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와닿을 것이다. 우리의 바람은 바람을 타고 전해지고, 우리의 바람은 바람이 더 잘 느껴지는 어느 날 다가온다.

이전 15화 사람의 입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