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호주 토종꽃에 관해서도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호주 토종꽃들은 호주만큼이나 투박한 원시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만, 호주만큼이나 선명한 색감을 가진 꽃들이 많다. 그중 내가 요즘 사랑에 빠진 꽃은 'Straw Daisy'라는 꽃이다. 이 꽃이 특별히 다른 꽃보다 훨씬 더 예쁘다거나 특색 있게 생겨서가 아니다. 이 꽃은 말린 후에도 자신의 색과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물기가 많은 꽃들은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수 시간 내에도 시들어 아름다웠던 모습이 사라지게 된다. 자신을 물로 채우고 있었던 꽃들은 그 물기가 사라지면 자신의 모습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물로 채우기보다 자신만의 모습으로 더 채우고 있었던 꽃들은 물기가 사라저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Straw Daisy'가 바로 그런 꽃이다.
이웃에 유기농으로 꽃을 재배해서 벼룩 판매를 하는 분이 계셔, 그분에게서 'Straw Daisy' 모종과 꽃을 샀다. 모종은 얼른 자라기를 바라며 화단에 심어두었고 꽃은 거꾸로 매달아 벽에 걸어두었다.
꽃을 말리며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나에게는 하루 중 설레는 일과가 되었다. 꽃봉오리들은 아직 몸에 남아 있는 수분을 모두 끌어다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을 파는 이웃이 꽃을 말리길 원하면 만개한 꽃보다는 아직 봉오리로 있는 꽃이 좋다 하셔서 못다 핀 꽃들을 샀는데 그 꽃들이 거꾸로 매달려 조금씩 조금씩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어떤 영양공급원이 없어도 누군가가 넣어준 생체 시계의 리듬대로 꽃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신을 아름답게 마무리해 보이려는 듯이, 꽃은 그렇게 마른 공기 중에서 아무것 없이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을 말리면서 큰 기대는 없었다.
'아무리 말리기 좋은 꽃이라지만 정말 생화였을 때 가졌던 모양과 색깔을 간직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흔히 보는 말린 장미는 아무래도 생화의 모습과는 간격이 크다. 말라 쭈글쭈글하고 빛바랜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생화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Straw Daisy를 말릴 때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달 여가 흐르고 꽃이 잘 마른 상태가 되자 나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꽃은 자신의 모습과 색을 여전히 또렷하게 지니며 보란듯 그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생화였을 때보다 더 고혹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자태를 빛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꽃을 보고, 또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바싹 마른 상태가 되었는데도 작은 봉오리는 봉오리대로, 좀 더 큰 봉오리는 살짝 꽃잎을 터트린 상태로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은 채, 선명한 색으로 남아 있었다. 말린 꽃이었지만, 죽은 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꽃이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름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Straw Daisy는 생화일 때도 꽃잎에 수분기가 별로 없었다. 이름이 알려주듯 꽃잎의 느낌은 빳빳한 짚 같은 느낌이다. 수분에 의존하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이 아이는 수분에 대신 자신의 무언가로 자신을 채우는 꽃이었다.
이유를 알게 되자 마른 Straw Daisy 꽃들이 더 기특하게 보인다. 더 안아주고 싶고 더 사랑해 주고 싶어 진다. 더 대견하고, 꽃이지만 존경마저 간다.
나는 나를 나의 모습으로 채우고 있는 중일까. 무언가 나에게서 없어진다 해도 나의 모습과 색을 계속 간직하며 나로 남을 수 있을까. 생명력이 사라진 다음에도 여전히 생명력이 전해지는 그런 모습일 수 있을까.
아들에게 말린 꽃들을 꽃병에 담아 선물하려 한다. 아들이 이 Straw Daisy처럼 자신을 자신으로 잘 채워가기 바란다. 무언가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을 채웠다가 구멍이 나거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길 바라며, Straw Daisy처럼 자신만의 색과 모습으로 자신을 채워가기 바란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증발되고 없어질지라도, 나에게 남은 내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발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