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혹은 반강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보육을 마치고 5살 아이를 처음 유치원에 보내던 첫날, 몸도 마음도 불편한 하루를 보냈다. 갓난쟁이 아기도 아니고 50개월을 훌쩍 넘긴 아이를 떼어놓기 힘들어하는 엄마를 다들 '유난이다' 혹은 '과잉보호다'라고 여겼다.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가 모두 비슷하겠지만 다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아이를 일찍부터 기관에 맡기고 마음 편히 지낸다고 해서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엄마가 오랫동안 가정에서 아이를 보살핀다고 해서 자식사랑이 남다르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불안염려증에 걸린 초보 엄마일 뿐이다. 아이가 36개월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믿고 맡겼던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사고를 당한 이후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깊게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아이가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도 곧바로 아이를 데리러 가지 않았다. 어린이집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단지 내 있었고, 나는 집에 있었다. 아이가 넘어져서 앞니가 부러진 것 같으니 당장 검사를 위해서 치과에 가야 된다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달려가지 않았다. 하필 점심시간이라서 바로 진료도 못 보고 아이를 데리고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잠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가보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다. '유별나다' '극성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아이가 다쳤다는 연락을 받은 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멍하니 서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오셔도 딱히 어머님이 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원장의 설명과 '어머님이 오시면 혹시라도 아이가 동요해서 검사받기가 더 힘들지 않겠냐'는 얘기를 듣고 나는 그냥 기다리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얼마나 쉬운 엄마였을까?
2시간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치료를 끝내고 돌아왔다는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데리러 갔다. 나는 그때도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는 선생님에게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미안해하는 선생님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놀란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야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아이가 다칠 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cctv 영상과 치료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화장실에서 일어난 사고라서 확인불가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화장실까지 감시카메라를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아이의 사고는 오해를 불러오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사고가 있던 당일 아이는 통증 때문에 음식을 씹을 수가 없어서 부드러운 케이크로 간신히 끼니를 때웠다. 나는 아이를 약 2주 동안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정말 많은 생각이 나를 흔들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사과를 하던 담임선생은 그날 이후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잘 모를 수도 있잖아... 일하느라 바쁘겠지...' 주문을 외우듯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이미 벌어진 일에 잘잘못을 따져서 뭐 하겠어...'라는 멍청할 정도에 관대함은 종착점을 찾지 못한 비난의 화살이 돌고 돌아 결국 나 자신에게 꽂히도록 만들었다.
사고 직후
사고 전 치아
전업주부인 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생기는 자유시간은 고작 5시간 30분 정도였다. 맞벌이 엄마들에게는 하지 않는 빠른 하원, 늦은 등원을 다니는 내내은근히 권유했기 때문이다. 집에 오면 정상체온인 아이를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열이 있다며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연락을 받기도 했었다.
그 덕에 나는 어린이집을 이용하면서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여가를 즐길만한 돈도 없었다. 다만 조금이지만 내게 주어진 귀한 자유시간을 최대한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집안일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자기 계발을 위한 공부 또는 운동도 하며 지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없는 곳에서 크게 다친 아이를 보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길래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을까 싶은 생각에 엄청난 죄책감 마저 들었다.
반면에 영유아 전문 국공립 어린이집이라는 그곳은 보육교사들에 대한 복지가 어찌나 남다른지 반마다 교사들의 자녀가 한두 명씩은 다니고 있었다. 어린이집 운영진은 교사 겸 학부모인 그들이 맡아서 했으며 원에서 진행하는 행사나 학부모 수업도 지들이 다 알아서 하는 시스템이었다.
사실 나는 어떤 시스템으로 원이 운영되던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저 내 아이를 잘 보살펴 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진상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자살한다는 교사들에 대한 뉴스가 한창 나오기도 했던 시기였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지만 도저히 이해 불가인 진상 엄마들을 경멸했다. 나는 오히려 교사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나름 모범적인 엄마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동안 느꼈던 불편한 감정들은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멀쩡히 잘 다니다가도 해당 선생님만 보면 자지러지게 울면서 등원을 거부한다거나 주말 내내 즐겁게 놀다가도 내일은 어린이집에 안 가도 되냐고 수시로 확인하는 아이를 보면 어떤 부모라도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기 마련일 것이다.
아이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서 어렵게 말을 꺼내면 어김없이 무성의하고 아무 의미 없는 대답만 돌아온다. "어린이집 안에서는 너무 잘 지내요 어머님!" 어차피 내가 확인도 할 수 없는 얘기다.
답답한 마음에 '퇴소밖에 방법이 없나?'라는 고민을 하면서도 막상 키즈노트에 올라온 즐겁게 지내는 아이의 사진을 보면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 매일 마음이 복잡했다.
기관이 제공하는 교육의 장점과 엄마만이 줄 수 있는 안전한 사랑 사이에서 매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사고 이후에도 나는 바로 퇴소라는 단어를 꺼내기 힘들었다. 누가 봐도 원에 대한 불만 때문에 퇴소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보내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다스리며 드문드문 그렇게 세 달가량을 더 보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신뢰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퇴소 의사를 밝혔다.
말도 안 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냥 당당하게 아이를 위한 결정이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도 있다. 하지만 후회보다는 경험을 통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이는 금방 회복되었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또한, 엄마인 나도 많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아이가 다쳤을 때 대처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매뉴얼로 싹 정리가 되어있다. 그저 다시는 그 매뉴얼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