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집에서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둑이라고는 기본밖에 모르는 내가 가르쳤으니 그 실력이야 오죽했겠냐마는 그나마 단수, 축, 장문 등의 기본기 정도라도 익혔으니 그것만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이 제대로 된 바둑 선생님을 만나고 그 선생님께 바둑을 배우며 바둑실력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었고, 사랑하는 딸도, 부인도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늘 아이가 수업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배움을 습득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둑과 함께하는 부부의 시간
사랑하고존경하는 부인께서도 바둑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함께 수담(手談)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수담'이란 한자 그대로 손을 통해 나누는 대화를 말한다. 서로 상대하여 말 없이도 의사가 통한다는 뜻으로, 바둑 또는 바둑 두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흔히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대화를 하지 않고, 손으로 바둑돌을 하나씩 놓아가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상대의 기질과 의도를 알 수 있다.
바둑 하수(下手) 중에서도 하수인 우리 부부이지만 반상(盤上: 바둑판의 위)에서 오가는 '흑'과 '백'이 나누는 '수담'속에서 서로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고, 심각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수담'이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명언(名言)은 통상 '사리에 맞는 훌륭한 말'이나 '널리 알려진 말'을 뜻하는데, 나는 다음에 소개되는 말을 '명언'이라기보다는 '격언'(格言: 오랜 역사적 생활 체험을 통하여 이루어진 인생에 대한 교훈이나 경계 따위를 간결하게 표현한 짧은 글)이라고 해두고 싶다.
바둑을 둘때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10가지 '격언'이 있는데, 그것을 바로 '위기십결(圍棋十訣)'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마찬가지 이지만 부부생활을 해나감에 있어서도 덕목으로 삼고 실천하면 좋을 듯 하여 소개한다. '바둑 둘 때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10가지 교훈' 또는 '바둑을 잘 두기위한 10가지 비결' 즉, '바둑의 10계명'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십결'을 만든 사람은 근래까지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당 현종의 '기대조(棋待詔; 황제의 바둑 상대역을 맡는 벼슬의 일종)'를 지냈던 바둑 고수 왕적신(王積薪)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2년 여름, 대만의 중국교육성 바둑편찬위원인 주명원(朱銘源) 씨가 "위기십결은 왕적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송나라 때 사람 유중보(劉仲甫)의 작품"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함에 따라 현재 위기십결의 원작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한-중-일 바둑사 연구가들의 숙제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1. 부득탐승 (不得貪勝) - 승부에 집착하다보면 오히려 그르치기가 쉽다.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라. 바둑은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므로 바둑을 둘 때는 필승의 신념을 갖고 자신 있게 두어야 하지만 '필승의 신념'과 '이기려고 하는 마음'은 다른 것이다. 필승의 신념이 있으면 과감하게 나가야 할 때 과감할 수 있고 모험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모험도 불사할 수가 있다. 그러나 꼭 이기고 싶어하는 마음은 '결코 져서는 안 된다' '내가 지면 어떡하나'하는 마음인데, 이렇게 처음부터 부담감으로 작용되어 바둑을 원활하게 둘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인격수양을 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위기십결'의 원작자가 바둑을 잘 두기 위한 10가지 비결 중에서도 바둑의 기술적인 내용들은 뒤로 제치고 '부득탐승'이라는 마음의 자세를 제일 위에 놓은 것도, 아마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항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간에도 이기려고 하는 마음은 내려놓도록 하자. 그저 상대에게, 그리고 나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 아닐까?
2. 입계의완 (入界誼緩) - 상대의 경계를 넘어 들어갈 때는 기세를 누그리고 천천히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포석(布石: 중반전의 싸움이나 집 차지에 유리하도록 초반에 돌을 벌여 놓는 일)이 끝나고 나면 상대방 진영과 우리 진영 사이의 경계가 윤곽을 드러낸다. 바로 그때 서두르지를 말라는 것이다. 세상만사 결코 서둘러서 좋은 일은 없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내 집보다는 남의 집이 커 보이는 법이다. 내 집만 크게 키우는 방법이 없을까를 심사숙고하기 시작하는데, '입계의완'은 바로 그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 '입계의완'이 추구하는 것은 '정확한 형세판단을 할 수있는 경지'로도 보는데, 이는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인내하고 절충하여 타협의 방안을 찾고, 나아가 중용의 단계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이 각자의 수읽기, 전투력 등의 기량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형세판단'이라고도 하니 '입계의완'을 <위기십결>의 두번째로 둔 것이 실로 용의주도한 배려라고 아니 할 수 없다.
3. 공피고아 (攻彼顧我) - 상대방를 공격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결함을 먼저 살펴라. 과연 나에게 약점은 없는지? 혹시 반격을 당할 여지는 없는지를 꼼꼼히 살펴 본 후에 공격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겨묻은 개가 똥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처럼 원래 사람은 상대의 아픔은 보지 못해도 내 손가락 끝에 박힌 조그만 가시는 크게 느끼는 법이다. 부부간에도 내 결함을 먼저 살피고 상대에게 할 말은 하자. 스스로를 돌보지도 못하면서 어찌 남의 허물만 들추어 낸단 말인가.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4. 기자쟁선 (棄子爭先) - 버릴 것은 버리더라도 선수(先手: 먼저 두는 것)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돌 몇 점을 희생시키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수는 돌을 아끼고 상수는 돌을 버린다'는 속담이 있다. 불가(佛家)의 선문답(禪問答)을 연상케 하는 중국의 섭위평 九단이 승부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 바로 "버려라. 그러면 이긴다."이다. 조치훈 九단과 중국의 섭위평 九단은 '기자쟁선'을 가장 멋지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프로기사이다. 지금 내 자존심을 버리고, 지금 부인(남편)에게 하고싶은 말을 참으면 머지않아 '선수'를 잡을 수 있다. '선수'를 잡은 이후 조근조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자.
5. 사소취대 (捨小取大) -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노려라.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손실을 입는다)과도 유사한 뜻인 이 말은 '기자쟁선'과 일맥상통하는 말로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나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 또한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승부에 집착하거나 너무 집중하게 되면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은 크게 보이지만 멀리 있는 큰 이익은 작게 보이는 것이 인간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아닌가. 항상 냉정하게 생각하고 눈앞의 작은 이익 보다는 멀리 내다보고 생활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부부간에도 눈앞에 보이는 상대의 사소한 실수를 트집잡아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보다는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생활한다면 큰 이익이 곧 다가올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