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 24.2Km. 7시간. 어려움 5. 풍경 5
밤 9시, 남녀 30명 가까이 자는 알베르게는 소등된다. 짤 없다. 생장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잠이 들 법도 한데,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30명 모두가 새 침낭이다. 빳빳한 마찰음이 서로에게 미안하다. 귀마개를 꽂았다. 멍한 진공 상태가 된 것 같다. 코 고는 소리가 귀마개를 뚫고 들어온다.
설렘인지 시차 때문인지 아직은 모를, 어찌 되었든 새벽 5시가 넘어 눈을 떴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사람들은 벌써 아침을 챙겨 먹고 있었다. 나도 컵라면 하나 먹고 출발을 서둘렀다.
아침 6시, 사방이 컴컴하다. 알베르게 앞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급하게 스마트폰 지도를 켜본다. 그때 알베르게를 나선 누군가가 유유히 혼자 어둠 속을 걸어간다. 눈치껏 그 사람의 뒤를 따라나섰다.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빛난다. 살면서 이런 별을 본 적이 있었던가.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은 첫날부터 산을 올라야 한다. 해발 1,500m 고지, 결코 만만치 않은 높이다.
하지만 순례길 전체 구간을 통틀어 가장 힘든 곳인 동시에, 최고의 절경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피레네 산맥 루트는 4월 1일부터 길이 열린다고 한다. 어제 크레덴시알 만들 때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 때문이었을까. 기가 막히게 날씨가 좋다. 1시간여를 묵묵히 걷다 보니 해가 떠오른다. 일출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그토록 새벽부터 서둘렀던 이유는 피레네에서 이 일출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약 2시간을 걸어 오리손(Orisson)에 도착했다. 오리손에는 알베르게가 딱 하나 있다. 보통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예약이 오픈되는 2월경에 10월까지 예약이 꽉 찬다. 내가 가고 싶은 날짜와 맞추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심지어 이곳 예약 일정에 맞춰 전체 순례길 일정을 잡는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다.
오렌지 주스와 케이크 한 조각을 샀다. 생오렌지를 그 자리에서 바로 즙을 내어 준다. 와, 그 상큼한 맛이란! 조각 케이크는 타르타 데 산티아고(Tarta de Santiago)라고 한다. 케이크 종류가 많다고 한다. 보통 밀가루를 쓰지 않고 아몬드, 설탕, 달걀로 만들어 밀도가 높다고 한다. 흔히 점심 대용으로 맥주나 커피에 조각 케이크 하나면 든든하다.
2025년 4월 유로 환율이 15년 만에 1,700원을 돌파했다. 주스와 케이크 가격을 합치면 10유로가 넘는다.
비싸다.
풍문으로 들었던 피레네 산맥은 마치 하늘로 이어지는 길 같았다. 그래서 숨이 찬 걸까. 끝없는 오르막길이, 9kg에 달하는 배낭의 무게도 만만치가 않다. 이 시간을 묵묵히 참고 올라가면 능선을 따라 걷는다. 능선에서는 절경이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지는 능선 풍경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혼자서 이 엄청난 경치를 본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혼자라서 온전한 위로를 받는다.
오롯이 혼자 걷는 이 길은 더할 나위 없는 성장의 길이다. 고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즐길 줄 아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능선에서 보는 경치도 잠시다. 물린다. 그래서 물만 먹는 걸까. 천 리 길도 한 걸음이라는 속담은 진리다. 걸으면 된다. 걸으면 도착한다. 산은 정상이 있다.
피레네 정상에 도착했다. 저 멀리 론세스바예스가 보인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저기 보이는 순례자가 나를 보며 "릴랙스, 릴랙스" 하고 말했다. 아마도 나처럼 서둘러 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주변 경치와 성취감을 온전히 느끼고 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목적지가 손에 잡힐 듯 보여서 무작정 서두르는 것과, 덜렁 사진만 하나 찍고 가기엔 눈에 담을, 가슴에 담을 풍경이 많은 이곳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는 것 중 뭘 택해야 할까.
나는 배낭을 내려놓았다. '릴랙스'라는 단어의 힘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무조건 '빨리빨리'라는 불안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평생을 그렇게 쫓기듯 살아와서, 여기까지 와서도 그랬던 건 아닌가 싶다. 알베르게는 예약이 되어 있다. 여유를 좀 가져야겠다.
내게 릴랙스를 말한 순례자가 아무 말 없이 사과 조각을 내게 건넸다. 받아먹으니, 스낵을 건넸다. 또 받아먹었다.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오, 코리아"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영어가 서툴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물병을 다 비웠다.
족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나간 거 같다. 사람들은 사진 하나 찍고 빠르게 내려갔다. 릴랙스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나는 배낭을 다시 멨다. 내게 스낵을 또 건넨다. 아무것도 줄 게 없는 빈털터리라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 나는 "부엔 까미노"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려가는 길이 두 개다. 빠른 길을 택했다. 여유는 개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가파른 경사길이라 위험한 곳이다. 다행히 비나 눈이 오지 않아 미끄럽지는 않지만 조심스럽다. 한참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아직 더 가야 하나 싶을 때, 시냇물이 보였다. 드디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숲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알베르게다.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알베르게 입구에 민들레 꽃밭이 보인다.
알베르게에는 어림잡아도 100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모인 것 같다. 체크인이 먼저다. 색깔 있는 목걸이를 나눠 준다. 거기에 있는 QR코드를 찍으면 설문조사 페이지로 이동한다. 아마 순례자 통계를 내기 위함인 듯했다. 질문은 간단하다. 어디서 왔는지, 이동 방법과 방문 목적, 이메일 주소, 그리고 한국 집 주소 정도. 대충 입력하고 넘어가면 된다. 그러면 입력한 이메일로 다시 새로운 QR코드가 날아오고, 목걸이 색깔별로 줄을 서서 체크인을 진행하게 된다. 이때 메일로 받은 QR코드를 보여주면 끝이다.
나는 숙소와 순례자 저녁을 미리 예약하고 결제까지 마친 상태였다. 예약 메일을 보여주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체크인에만 족히 1시간은 걸린 것 같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꽤나 현대식 건물이었고, 뜨거운 물도 콸콸 잘 나왔다. 4인이 한 공간을 쓰는 구조다. 침대에 일회용 부직포 시트를 깔고 침낭을 쫙 펼쳐 놓으니 그제야 꼬르륵 배가 고파온다. 저녁 식사 시간은 오후 7시. 아직 3시간이나 더 남았다.
내 휴대폰도 배가 고픈 상태다. 누군가 두고 간 충전기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없다고 한다. 알베르게 매점에서 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점에서 다행히 C타입 충전기를 찾아냈다. 휴대폰에 노트북, 마이크, 드론까지 충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 같지만 별수 없다. 아쉬운 대로 전자기기부터 밥을 먹였다.
드디어 저녁 시간. 순례자 메뉴는 식전 빵, 스파게티, 그리고 돼지 목살 스테이크다. 고기와 생선을 선택할 수 있는데 무난한 고기가 좋을 것 같았다. 고기가 고기다.
국적도 나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 열 명 남짓과 마주 보고 앉았다. 처음엔 다들 낯설어 식사에 집중했다. 이내 온갖 억양의 영어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내게 영어는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쪽 귀로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영어 붙잡을 실력이 없다. 입으로는 부지런히 음식을 채워 넣으며 와인이나 훌쩍였다. 테이블당 와인이 한 병씩 제공되었지만, 목마른 순례자들에겐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스테이크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돼지 목살이지만 육즙이 장난 아니었다. 천만다행으로 같은 테이블에 한국인 두 분이 계셔서, 우리말을 나누며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다.
피레네 산맥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출발 전부터 그토록 걱정하며 온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하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별것 없었다. 피레네 산맥을 무사히 넘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면 800km 여정의 절반은 해낸 것이나 다름없다.
성경이나 코란 등 종교 경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이 있다고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특히 성경에서는 학자나 번역본에 따라 횟수는 다르지만, 보통 365번이나 등장한다고 한다. 신이 인간에게 1년 365일, 매일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당부한 것이라는 아주 유명한 해석이다. 참고로 나는 무교다.
사실 나는 설렘보다는 두려움과 막막함, 정체 모를 감정을 한가득 안고 순례길에 올랐다. 하지만 오늘 하루 피레네를 넘으며 깨달았다.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남은 800km의 여정도 무사히 걸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팁]
1. 오리손에서 오렌지 주스는 꼭 마셔보길.
2. 피레네 정상에서 내려가는 새로 생긴 길, 우회길을 추천
3.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사전 예약 하는 걸 추천. 식사도 예약 추천
- 예약 사이트 : https://alberguederoncesvalles.com/solicitud-de-reserva/
- 한국어 번역됨
4. 빨래는 여기서 하지 말자. 사람도 많고 시간이 너무 걸린다.
5.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 이제 앞으로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 :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 de Roncesval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