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리에서 팜플로냐
아침에 일어나 침낭을 파묘했다. 며칠만에 잠을 푹 잔거 같다. 어제 같이 식사 했던 분은 벌써 출발 한거 같다. 두 사람의 표정이 이상하다. 내가 코를 많이 골았나 싶기도 하다. 아. 이제 알았다. 사람이 적은 곳에서는 내가 불리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제 저녁 폭립으로 폭식해서 배를 채웠는데 배가 고프다. 사과 하나를 베어 물고 길을 나선다. 서둘러 알베르게를 빠져 나왔다.
밤새 비가 내린 거 같았다. 밖은 깜깜하다. 후레쉬의 좁은 조명이 오늘도 큰 안도감을 준다. 어두운 길거리에 후레쉬 불빛이 어른거린다. 사람이 한 명씩 보인다. 팜플로냐로 가려면 다시 분노의 다리(Puente de la Rabia)로 가야 한다. 다리를 등지고 우회전을 하면 된다.
오늘 코스는 20km다. 보통 천천히 걷는다면 15분에 1km. 시간당 4km 정도 계산하면 얼추 맞는 것 같다. 20km면 5시간. 중간에 쉬는 시간을 합친다고 해도 6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 같다. 그렇다면 밥은 팜플로냐에 가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는 계산이 선다. 먹기 위해 오늘도 걸어가야 한다. 오늘도 팜플로냐에서 와인과 맛있는 음식에 모든 것을 걸겠다.
마을을 벗어나는 1시간가량은 숲길이다. 밤새 온 비로 곳곳이 진흙탕이었다. 작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그렇게 힘든 구간은 아니다.
멀리 보이는 첫 번째 마을이 우르다니즈(Urdániz)다. 뭘 사 먹으러 가기엔 동선에서 너무 벗어난다. 그래서 패스.
가는 길에는 12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다. 석조로 만든 고딕 양식의 구조를 지녔고, 제단 아래에는 13세기 벽화가 남아 있어 당시 신앙과 지역 전통이 섞여 있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출발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서서히 해가 뜬다. 넓은 초원을 지나면 라라소아나(Larrasoaña) 마을이 보인다. 여기까지 5.2km, 2시간 정도 걸렸다. 이 마을도 동선에서 떨어져 있다. 역시 패스다.
출발한 지 2시간 30분, 오전 9시 13분에 드디어 뭔가 먹을 수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다리 바로 좌측이 카페다. 그런데 그닥 땡기는 게 없었다. 나는 탄수화물이, 제대로 된 밥이 먹고 싶다. 빵쪼가리는 먹기 싫었다. 나는 먹기 위해 걷는다. 초코바 하나를 냠냠했다. 따뜻한 햇볕에 잠시 누웠다가 물 한 모금만 마시고 다시 출발한다.
이로츠(IRPTZ)마을을 지나면 공중 화장실과 쉴수있는 쉼터가 있다. 여기서 많은 한국분들이 쉬고 계셨다. 나는 패스.
숲길을 빠져나오니 갑자기 돌 다리가 보였다. 트리니티 브릿지는 팜플로나로 들어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순례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 즉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한다. 800년 넘게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은 장소이자 순례길의 역사적 상징 중 하나라고 한다.
여기서 뭘 좀 먹을까 했지만 이제 코앞이 팜플로냐다. 팜플로냐는 큰 도시다. 맛있는 음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마을도 꾹 참고 그냥 지난다.
트리니티 브릿지를 지나면 제법 큰 도시가 펼쳐진다. 며칠 만에 보는 자동차와 현대식 건물에 어리둥절하다. 출발한지 약 5시간 30분, 오후 1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드디어 팜플로냐인가' 했지만 그 전 마을인 비야바(Villava)다. 팜플로냐 옆 동네인 것 같았다. 여기서 충전기를 샀다. 고용량 차저와 C타입 2M 선도 구입했다. 돈이 아깝다.
드디어 진짜 팜플로냐다. 마달레나 다리는 팜플로냐의 상징적인 입구로 여겨지는 중요한 곳으로, 12세기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석조 다리라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 팜플로나의 성벽과 프랑스 문(Portal de Francia)으로 향하게 된다. 그 안이 진짜 팜플로냐다.
속았지. 또 문이 나온다. 맞다, 팜플로냐는 성곽 도시였다. 나도 이제야 알았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소몰이 축제(산 페르민)로 유명하며, 도시 전체가 성벽과 성형 포병 요새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와 중세 건축물이 어우러진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한다. 여기 줌말라카레기 문은 팜플로나 성벽에 남아있는 중세의 정문 중 하나로, 순례자들이 시내로 최종 진입하는 관문이다. 바로 우측에는 전망대가 있다.
공립 알베르게로 갔지만 아직 체크인 전이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릴까 하다가 사립을 찾아봤다. 다행히 마달레나 다리 옆에 작은 사립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다. 체크인할 때 침대가 딱 3개 남아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조용해서 좋았다. 오늘 진흙길을 걸어서 바지가 엉망이다. 세탁을 또 해야 했다. 다행히 세탁기가 있어서 빨래를 하려고 보니까... 아차. 수비리에서 세탁물을 걷을 때 바지가 하나 빠졌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진흙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새 옷을 사러 나갔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여긴 트레킹 장비의 성지 데카트론(Decathlon)이 있었다. 바지 두 개 구입했다. 얇은 바지라 어떻게든 배낭에 구겨 넣어서, 앞으로 세탁하는 일과 시간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을 맡기고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밥을 먹으러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아하. 시에스타(Siesta, 스페인의 낮잠 및 휴식 시간)에 딱 걸렸다. 빨라도 저녁 8시 30분은 되어야 영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런 뜨거럴. 그 시간이면 내가 잠잘 시간이다. 게다가 알베르게는 저녁 9시 이후엔 관리인들도 퇴근하고 문이 잠긴다. 늦게 들어온다면 안에 있는 누군가 문을 열어 줘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까르푸에 가서 내일 먹을 간식과 오늘 저녁으로 때울 샌드위치, 음료수를 샀다. 아침에 분노의 다리를 건너서 그런가. 진짜로 분노가 속에서 끓어오른다. 종일 굶고 기대했던 대도시의 만찬이 나가리다. 샌드위치를 우걱 우걱 씹어넘겼다. 복숭아 음료수를 원샷 때렸다. 좀비처럼 허기가 가시실 않는다.
[팁]
1. 레스토랑을 갈 것이라면 피에스타시간을 확인하자.
2. 비야바(Villava)에서 전자물품을 구매 할 수 있다.
3. 팜플로냐에서 재 정비를 하자. 당분간 무엇이라도 사고싶어도 구입 할 곳이 없다.
공중화장실
https://maps.app.goo.gl/9WRy7msE3iLEwYg17
핸드폰 충전기 구매했던 곳
https://maps.app.goo.gl/ah5ocpRoPa4uxtYZ7
데카트론
https://maps.app.goo.gl/FXfkdEcvWcExRr7F6
알베르게 : Casa Paderborn
https://maps.app.goo.gl/YpnC97vv5NKs6pyo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