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2일차: 수비리까지 비실 비실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 21.4KM. 5시간 35분. 어려움3. 풍경4

by 쌈마이작가

이틀째 침대 2층에서 잠자려고 하니,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기겠다. 실리콘 재질 매트리스의 그 서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침낭을 뚫고 등에 전해져 온다. 옆으로 돌아 눕는다. 1인용 싸구려 침낭이 몸을 조이는 것 같다. 마치 솜뭉탱이로 만든 관 속에서 누워 있는 거 같다.


죽은 듯 잠들고 싶지만 청각은 더 예민해진다. 코 고는 소리와 소곤대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들. 참다 참다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에 한 단어가 떠오른다. 샤럽이었던가. 비콰이어트였던가. 모르겠다. 몰라서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제 얼마나 계속될까.


그래도 내가 질쏘냐. 나도 코를 곤다. 귀마개를 끼면 그만이다. 이제 모든 소음은 너희들 사정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떠거럴.




대놓고 떠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써 조심하지도 않는 소음에 눈이 떠졌다. 각자 순례길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스럽다. 귀마개를 뽑았다. 나도 그 소음 속에 내 소음도 섞는다. 솜뭉탱이에서 몸을 빼고 침낭을 구겨서 배낭에 집어넣었다. 이걸 파묘라고 해야 할까.


이제 매일매일 솜뭉탱이로 들어가야 한다. 나와야 한다. 이제 겨우 둘째 날이다. 앞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안락한 내 방도, 푹신한 침대도 없다. 그래서 안락한 공간을 원할 것이고, 혼자서 밤을 보내는 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내가 여길 왜 왔지'라는 현실 부정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돈지랄이 시작되는 거다.


5시간 이지만 실제로 약 +1시간 에서 2시간을 더해야 한다.


알베르게 식당에 있는 자판기 1유로 커피 한 잔이 달달하다. 사과도 하나 먹었다. 내 아침밥이다. 이제 먹었으니 걸어야 한다. 금세 허기가 밀려온다. 물을 들이켠다. 나는 지금 순례길을 걷는 게 아니라, 수비리(Zubiri)에 있는 식당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곳엔 맛집이 있을 것이다. 빨리 도착해서 기필코 맛있는 밥을 먹으리라. 그렇게 억지로 동기부여를 해본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공기가 꽤 쌀쌀하다. 앞으로 껴입을 옷이 변변치 않아 조금 걱정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추우면 그때 가서 생각 하자.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밖은 여전히 깜깜한 밤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 하다가 후레쉬를 켰다. 그 한 치의 인공적인 밝음에 두려움이 줄어든다. 두려워하지 말자. 그래, 가자.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니까.


수비리 까지 가는 길은 산길이다.


수비리까지는 대부분 평지와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어제 내린 비로 길바닥은 진흙길이 많다. 하지만 피레네 산맥에 비하면 껌이다. 아. 껌이라도 씹고 싶네. 간식을 충분히 챙기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먹는 게 걷는 것이고, 걷는 게 먹는 것인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해가 뜨니 금세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다. 배만 고파서 다행이다. 춥고 배까지 고팠으면 불쌍할 뻔했다. 저기 앞에 한국 분이 보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리를 두며, 혼자 걷는 길의 쓸쓸함으로 배고픔을 덮어본다.



허기가 지니까 힘들다. 먹은 건 커피 한 잔과 사과 하나, 물 몇 모금이 다다. 마지막 사과를 꺼냈다. 껍질에 주름이 져있다. 돗자리를 깔고 우걱우걱 씹는다. 사과 껍질이 두껍다. 껍질도 질겅질겅 씹는다. 사과도 달다.


사과는 껍질에 영양가가 더 많다는 말이 생각났다.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더 질기고 더 두껍게 되어야 하는 껍질에 영양가가 더 많다는 것이다.


문득, 그래서 나도 내 껍데기에 그토록 충실했던 걸까. 영양가 없는 내면을 숨기기 위해, 그 단단한 껍데기가 곧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철저하게 껍데기만 보여주기 급급했던 삶. 나도 다른 사람의 껍데기만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번듯한 껍데기에만 현혹되어 살아온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까지 내 삶도 참 사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사과다.


사과를 깨끗하게 발라 먹었다. 잡생각도 목구멍 깊이 삼켰다. 당 때문일까. 이틀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잠이 몰려왔다. 돗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잠도 참 달다.


푸드 트럭에 왔다면 수비리가 코앞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다는 건, 아마 살 수 있다는 생존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푸드트럭의 발견도 그랬다. 허기를 달래줄 푸드트럭, 이 생각지도 못한 발견에 '아싸 가오리'를 외쳤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람을 굶어 죽게 놔두지 않는다.


주스와 간식들이 보였다. 풍문으로는 순례자들이 여기서 대부분 콜라를 마신다고 한다. 갈증을 참고 걷다가 이곳에서 마시는 콜라가 그렇게 달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단것을 너무 많이 먹었다. 시원하고 씁쓸한 맥주가 당겼다. 맥주를 사고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꽝 하고 박았다.


여기에 죽치고 앉아 있으니 낯익은 사람들과 마주친다. 다들 각자 자리에 앉아 눈인사를 나눈다. 영어가 안 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며 나를 향해 "부엔 까미노"를 말했다. 나는 여유롭게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나도 말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그렇다. 내 껍데기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이 어느새 두 캔이 된다. 동네 마트에서 사 먹으면 반에 반 값도 안 할 맥주. 그렇다. 이건 돈지랄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이제 수비리가 코앞이다. 공립 알베르게는 선착순이다. 침대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하의가 3개, 속옷이 3개, 양말이 3개다. 배낭이 작아서 여유가 없어서 준비를 많이 못 했다. 오늘 입은 바지가 흙 때문에 밑단이 지저분하다. 세탁해야 한다. 매일 옷과 속옷을 갈아입는 것이 제일 큰 사치 같다.


빈속에 맥주가 알딸딸하다. 이 기분이면 지금 바로 800Km도 그냥 걷겠다.


수비리 입구와 라 라비아 다리(Puente de la Rabia)


오후 2시 30분에 수비리에 도착했다. 약 8시간 정도 걸렸다. 수비리(Zubiri)라는 마을 이름 자체가 바스크어로 다리가 있는 마을을 뜻할 정도로 이 다리는 마을의 상징적인 장소라고 한다. 구글 번역상 라비아의 의미가 분노가 먼저 나와서, 분노의 다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제 의미는 광견병, 공수병이다. 광견병 또는 공수병이 걸린 동물(또는 사람)을 이 다리의 중앙 교각 주위로 세 번 돌게 하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다행히 공립 알베르게에는 침대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직원이 없다. 약 10여 분 기다리니 한국 분이 바로 옆 사립 알베르게도 가격이 같다는 꿀정보를 알려주셨다.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아 내부가 깨끗했고 8명이 한 방을 이용했다. 다행히 4명만 체크인해서 안락한 밤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체크인을 했다. 배낭을 던져놓고 빨래를 먼저 해야 했다. 세탁은 주인이 세탁해서 건조대에 널어준다고도 한다. 그래서 10유로를 받는 건가. 17,000원이다. 이 돈을 세제처럼 물에 녹인다니. 돈이 아깝다. 돈지랄이다.


날씨가 갑자기 변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날씨도 지랄이다. 주인이 비를 안 맞게 실내에 빨래를 널어 뒀다지만 다 마를까 싶다. 느낌이 싸하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 참 애매한 시간이다. 동네 슈퍼와 식당은 다 문 닫았다. 시에스타 때문이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동네를 둘러보지만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알코올 기운이 떨어지니 허기는 더 심해졌다.



오후 4시. 알베르게를 소개해 준 한국 분과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물론 뿜빠이(더치페이)다.

'Bar Valentín'는 내부가 작았다. 하지만 한국어 메뉴판도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한국인들의 성지이자 수비리의 유일한 맛집이었다. 테이블 수가 적어 기다려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 바로 착석했다. 우리가 앉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국에서 단체로 오신 분들 같았다.


비비큐와 송어 구이를 시켰는데, 비비큐 맛이 너무 좋았다. 하루 종일 굶은 보람이 있었다. 와인 한 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먹었다. (2명 이상이면 와인 한 병을 시키는 게 더 저렴하다.)


식사를 마치니 날이 어두워졌다. 빗방울도 떨어진다. 문연 슈퍼가 보였다. 간단하게 내일 먹을 물과 간식거리 준비했다. 다시 침낭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론세스바예스 약 2Km 떨어진 아침에 문 연 식당

아침전문식당 : Goxona

https://maps.app.goo.gl/biPAGX47JDSoSKiS9

수비리 알베르게 : Albergue Segunda Etapa / 17유로

https://maps.app.goo.gl/VdU2AvFBqHUSA3Ja6

수비리 식당 : Bar Valentín

https://maps.app.goo.gl/tEWT3iQbqKigEAc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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