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이 땅을 다스렸던 많은 왕이 있었다. 저 멀리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가깝게는 조선 왕조까지 수많은 왕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이 많은 왕 중에서 제일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왕을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하면 누구를 꼽겠는가? 역사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를 바라보는 개인 시각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 없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꼽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막강한 철기병을 거느리고 드넓은 대륙을 거침없이 누비며 대제국을 건설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역사에서 한민족의 존재와 기상을 이토록 드높인 왕은 없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고구려가 먼저 삼국을 통일하고, 한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 대륙을 공략했다면 우리의 역사와 지도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시절, 막강한 힘을 지닌 고구려가 왜 삼국통일을 먼저 하지 않았을까?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한양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여주 땅에 두 기의 왕릉이 있다. 하나는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조선의 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의 왕릉이다. 다른 하나는 17대 왕 효종과 인선왕후 장 씨의 왕릉이다. 두 왕릉은 공교롭게도 똑같이 영릉이라 부른다.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점도 같다. 세종의 영릉(英陵)은 꽃부리 영(英)자를 쓰고, 효종의 영릉(寧陵)은 편안할 영(寧)자를 쓴다.
세종은 크나큰 치적을 이룬 역사의 인물이라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분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세종대왕은 다 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세종과 효종의 왕릉은 서로 이웃해 있다. 효종은 세종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역사를 보면 관심과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다.
조선의 건국 과정을 되짚어보면 고려 말 이성계는 우왕의 명을 받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4대 불가론을 주장하며 회군했다. 이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위화도 회군이다.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그 힘을 바탕으로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 건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질 생각은 없다. 나의 관심은 조선이 비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해보려는 큰 뜻과 야망이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어찌 보면 그 대답은 건국 과정에 이미 나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은 오랜 세월 비좁은 한반도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드넓은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웅대한 꿈과 장쾌한 기상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광개토대왕을 무척 좋아한다.
조선의 많은 왕 중에서 대륙 진출을 꿈꿨던 왕이 있었을까? 작은 땅을 다스리는 왕이 국민의 안녕과 국력의 열세를 무릎 쓰고 대륙을 넘보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벌을 계획했던 왕이 조선의 효종이다. 무모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조선 역사에서 그런 생각과 용기를 가진 왕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다.
세종의 영릉을 둘러보고 왕의 숲길이라 부르는 호젓한 길을 걸어 효종의 영릉으로 간다. 효종의 영릉은 원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있던 것을 현종 14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영릉에 들어서면 기세등등했던 사대부의 저택처럼 보이는 재실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동안 보았던 조선 왕릉의 여느 재실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영릉 재실은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참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원형이 훼손되었다.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건축물이다. 빛바랜 건물에서 지나온 세월의 묵직함이 느껴진다. 소중한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재실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세 그루의 나무이다. 재실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향나무가 있고, 오른쪽에 회양목이 있다. 조금 떨어져서 느티나무가 서 있다. 나무들은 영릉 재실과 함께 희로애락의 흘러간 세월을 고스란히 품었다.
향나무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쭉 뻗어 올라갔다. 겨울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은 회양목은 수령이 자그마치 300년이나 되는 천연기념물이다. 세 그루 나무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육중한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재실의 마당을 가르는 돌담 끝에 서 있다.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어 돌담이 끊어졌다. 우람한 몸통이 두 방향으로 갈라지고 거기서 굵은 줄기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갔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회양목 못지않은 세월의 무게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릉 재실은 이 나무들이 있어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한층 더해졌다.
재실을 나와 흙길을 걸어 능으로 간다. 왕릉만의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길을 걷다 보면 길가에 나무들이 계절을 혼란스럽게 한다. 푸른 소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고, 그 뒤에는 바짝 마른 잎사귀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나무들이 있어 잠시 계절의 감각을 흐리게 한다.
흙길이 끝나는 곳에 왕릉이 시작됨을 보여주는 홍살문이 있고, 그 뒤로 일직선으로 뻗은 참도가 이어진다. 왕릉의 건물배치가 그렇듯 참도 끝에는 능의 중심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좌우에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자리 잡고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은 금천교다. 능 구역과 속세를 구분해주는 금천교는 홍살문 앞에 있는 것이 조선 왕릉의 공간 배치이다. 그런데 영릉의 금천교는 홍살문을 지나 참도 중간쯤에 놓여 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는지 그 이유가 꽤 궁금하다.
정자각을 살펴보고 능침으로 올라간다. 영릉은 조선 왕릉의 여섯 가지 봉분 조성 형태 중에서 동원상하릉에 속한다. 동원상하릉은 같은 언덕 위아래에 두 개의 봉분을 조성한 것이다. 앞에 있는 것은 인선왕후의 능이고, 뒤에 있는 것이 효종의 능이다. 뒤에 있는 효종이 인선왕후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청나라의 2차 침입으로 일어난 병자호란 후에 효종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나라에서 고초를 겪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변사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볼모로 잡혀 지냈던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원대한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하면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효종의 북벌계획은 사대부의 반대로 위기에 봉착했고,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소멸하고 말았다. 만약 효종이 살아서 생각과 의지대로 북벌을 실행에 옮겼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고, 만일이라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살아서 실행에 옮겨 설사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 얼마나 대단한 왕의 기개인가.
조선의 왕 중에서 나라가 당한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당차게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던 왕이 있었던가. 사람 사는 세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상황이 얽히고설키어 있다. 그것처럼 그 시대의 역사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시대적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일단 접어둔다. 어찌 되었던 그 당시 대륙의 최강자인 청나라를 상대로 과감하게 북벌을 실행하려 했던 효종은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조선의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