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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Aug 16. 2023

너의 이름은

양쌤의 another story 52

 답답해서 살짝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급하게 빗방울을 껴안은 채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제야 여름밤의 빗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창호를 교체한 후론 외부의 소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거칠게 비바람이 불지만 않으면 빗방울이 가득한 창의 풍경은 음 소거가 된 TV 같다.

 27층, 비는 눈앞에 머무르지 않고 한참 아래로 떨어졌다. 무수한 세로의 선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불투명 필터를 덧댄 것처럼 밤의 색은 선명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땅을 훑고 흘러가는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공중에서도 비는 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런 빗소리가 오래 들리는 날은 안양천이 물에 잠기곤 했다. 밤새 호우주의보가 호우경보로 바뀔 것 같았다.      


 비가 아침까지 계속되면서 안양천 인근에 주차된 차량을 이동하라는 방송이 아파트까지 들려왔다. 보통 이런 날이면 게으름의 최대치를 끌어내며 빈둥거리기 마련인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동안 미뤘던 일을 꼭 해야 할 것만 같아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도 하기 전에 차를 두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버스 에어컨 바람에 젖은 옷들을 진정시키자마자 다시 빗속으로 들어갔다. 비바람 속에서 우산이 하는 일이라곤 안경과 앞머리를 사수하는 것뿐이었지만 그 쓰나 마나 한 우산이 어찌나 의지가 되는지 꼭 붙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비 오는 날엔 췌에리를 드세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를 조합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치전도 부추전도 아니고 체리라니! 잔뜩 몸에 힘을 주고 걸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긴 비 오는 날이라고 꼭 기름 냄새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 하나. 꿉꿉한 날씨와 엉겨 바닥을 치는 몸의 리듬을 끌어올리는 데에 새콤달콤 체리 좋다. 딱 좋다.

 신호등 아래에 서서 과일가게 쪽을 슬쩍 보았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그들보다 더 큰 우산에 가려 목소리의 주인공도 체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으로 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의 말은 짧지만 힘이 셌다. 비의 기세에 눌렸던 나의 하루가 갑작스러운 체리의 등장으로 금세 생기가 돌았으니까.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과일가게 주인장의 나직한 외침은, 적어도 그날만큼은 호객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라고 건네는 인사 같았다. 오늘 장사는 아무래도 물 건너갔지만, 나도 당신도 흠뻑 젖은 옷처럼 착잡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지 말자는 다독임이었다. 가볍지 않은 체리의 붉은 빛이 산뜻하게 마음속에 번졌다.

 거의 매일 체리를 생각한다. 비 오는 날의 체리, 온통 무채색인 날의 체리. 반짝 해가 뜬 날의 체리. 날이 좋아서 좋지 않아서 체리가 생각났다. 그러다가 체리의 특별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체리의 맛, 체리의 향, 체리의 빛깔.

 체리가 수박, 참외, 포도보다 더 대단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체리였을까. 주인장에게 비와 체리가 얽힌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가게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많은 과일 중에서 주인장은 왜 비 오는 날 체리를 먹으라고 했을까.      

 문득 오래전 열심히 읽었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아….

 비가 무지하게 퍼붓던 오후, 주인장이 마이크를 잡고 체리를 외친 순간 체리는 특별해졌다. 물 건너온 것 빼곤 밋밋했던 체리의 일생이 역주행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스티로폼 용기와 랩에 쌓여 적당히 대접받던 수입 과일이 아니라 하얀 생크림 조각 케이크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마지막에 올려진 특별한 존재,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잊고 있었던 것, 감추어졌던 것,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체리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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