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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Jul 31. 2023

난 네게 반했어

양쌤의 another story 51

 볕이 좋은 날이면 빨래를 하고 싶었다. 외출했다가 더없이 화창한 하늘을 보면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무조건 빨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살림 못 하게 생겼다는 말까지 들은 마당에 주부 9단이나 살림의 고수 코스프레도 필요 없는데 왜 그렇게 빨래가 하고 싶은 걸까?      


 일 년에 서너 번 친정에 갈 때면 엄마는 이불을 미리 꺼내어 빨거나 햇볕에 널었다. 이불장 속에서 묵은 냄새라도 뱄을까 봐 그러신다 했다. 한두 개도 아니고 네 식구가 쓸 이불을 일일이 옥상까지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다.

 정성으로 손질한 그 이불에 아이들과 함께 뒹구는 시간은 엄마의 밥상 앞에 앉을 때 다음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엄마는 항상 이불을 많이 꺼냈다. 바닥에 등이 배길까 봐 두꺼운 목화솜 이불을 깔고 그 위에 얇은 면 이불을 깔았다. 덮을 이불은 사람 수 대로 꺼내 놓았다.

 엄마의 이불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면 따뜻한 냄새가 났다. 옥상의 쨍쨍한 햇볕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채운 이불은 금방 나를 무장 해제시켰다. 이불은 어떤 몸과 마음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은밀하게 햇볕 냄새를 품은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있으면 행복한 번데기가 된 것 같았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아이들은 다 커서도 외할머니의 이불을 좋아한다. 나는 아무래도 햇볕 냄새에 중독이 된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햇볕 좋은 날이면 서둘러 빨래를 하고 햇볕 아래 내어놓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틈만 나면 해가 잘 드는 집에서 사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오래 살아서 정든 집이지만 어둡고 온기가 없어 안 좋다고 했다. 제주도 바다 가까이에서 나고 자란 엄마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렸던 것이 도시의 단독주택에서는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부분이 되었다.

 엄마는 결혼한 지 35년이 넘어서 소원을 이뤘다. 귀촌하며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에 남쪽을 향해 가로로 길쭉한 집을 지었다. 게다가 이웃들이 일조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다. 옥상에 가지 않아도 넓은 마당 한 편에 맨 줄에 빨래를 널면 두세 시간 만에 바짝 마른다. 부엌과 다용도실을 빼곤 집안 어디나 해가 가득 들어오지만 덥지는 않은, 꿈에 그리던 남향집을 얻었다.

 빨래가 초록의 잔디 위로 그림자를 만들며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가끔 뜻밖의 힐링을 선사한다. 뜨거운 햇볕 아래 온전히 자신을 드러낸 젖은 모든 것들은 망설일 틈도 없이 움켜쥔 물기와 그만큼 무겁게 스민 냄새와 기억을 모두 내어놓는다. 그런 후에 채워진 햇볕의 냄새는 참 가볍지만 오래간다.


 나도 결혼 후 4년동안 서향집에 살며 엄마와 비슷한 소원이 있었다. 해 잘 드는 시원한 남향집에 사는 것. 나는 엄마보다는 빨리 7년 만에 그런 집에서 살게 됐다. 아파트 베란다이긴 하지만 실컷 해를 맞는 빨래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빨래가 다 마른 후 걷으며 냄새를 맡으면 엄마 이불과 같은 햇볕 냄새가 났다. 햇볕 냄새가 내 몸도 정화하는 것 같았다. 엄마 냄새를 맡는 것 같기도 했다.     

 건조기를 써본 지인들의 강력한 추천에도 빨래는 햇볕에 말리는 게 좋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었는데 두 달 전쯤 결국 건조기를 사고야 말았다. 올여름 엄청난 비 예고가 있었던 데다가 남편과 우연히 빨래방을 이용해 본 후 지인들이 왜 그렇게 건조기를 사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 일주일씩 오는 요즘이지만 건조기가 있어 빨래하는 일이 두렵지 않다. 빨래가 밀릴 일도 없다. 세탁할 때 해결되지 않은 먼지나 찌꺼기도 제거되어 빨래 개기도 훨씬 수월하다. 비가 오지 않아도 바쁜 날에는 건조기를 이용하곤 한다. 다 마른빨래에선 건조기용 드라이 시트의 허브향이 난다. 건조된 직후의 보드랍고 뜨끈한 느낌도 참 좋다. 왜 진작 사지 않았을까 후회가 될 정도로.


 그런데 뭔가 아쉽고 뭔가 불편하다.

 냄새, 냄새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 엄마의 이불에서 나던 햇볕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것, 그래서다. 나는 아무래도 빨래를 까슬할 정도로 다 말려주고 남긴 따뜻한 햇볕 냄새가 좋다. 오랜 비가 치면 건조기는 당분간 개점휴업 상태가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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