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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Sep 05. 2023

다음 생엔 나무늘보

양쌤의 another story 53

 나무늘보. 나무늘보? 왜?     


 동물로 태어난다면 어떤 동물로 태어나고 싶냐는 물음에 나는 나무늘보를 떠올렸다. 현존하는 포유류 중에 가장 느려서 천적이 접근했다가도 살아있는 줄 모르고 지나간다는, 가만히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동물.

 그런 나무늘보로 살아가고 싶은 걸까?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을 먹고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잠시 비멍에 빠졌다. 모처럼 한가로운 오전이다. 방충망이 있는 창 쪽으로는 산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빗방울이 방충망에 빈틈없이 들어찼다.

 메모해 두었던 글들을 연결할 사이의 단어들과 문장들은 퍼뜩 떠오르지 않고 괜히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앞뒤 베란다를 오갔다.     

 오늘, 오늘, 오늘. 오늘 할 일에 집중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오늘도 즐거웠고, 뭔가를 열심히 하긴 했는데 왠지 헛헛하다. 진짜 중요한 걸 빼먹은 건 아닐까.

 “뭣이 중헌디?”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뭘까. 일정표에 기록할 필요도 없이 늘 해야 하는 일들. 하지만 일정표에 기록된 일들을 먼저 하느라 뒷전으로 밀리다가 결국 못하고 또 못하게 되는 일들.

 급한 일과 중요한 일 중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중요한 일에 두어야 한다는 나는 실속 없이 허둥대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미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조급함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무늘보가 생각났나 보다.

 나무늘보는 땅 위에서 세상 느려터졌어도 큰일을 해결할 때 빼곤 나무 위로 내려올 일이 없으니 큰 문제없고, 물과는 상극인 나와 달리 헤엄은 빨리 칠 수 있다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하루 중 20시간 가까이 나무에 매달려 자며 거의 움직임이 없어서 많이 먹지도 않으니 삼시세끼 걱정할 것도 없다.

 시력과 청력이 좋지 않아서 답답할 때도 있겠지만 안 보고 안 들어도 될 것들을 자연스레 안 보고 안 들을 수 있으니 정신 건강에 좋겠다.

 웃지 않아도 웃는 듯한 얼굴과 일관되게 느긋한 움직임에서는 묘하게 인생을 달관한 고수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나무늘보의 삶이 부러운 건 아니다. 전혀 급하지 않고 욕심부릴 필요 없는 삶에서 내면과 외면이 조화롭게 느림을 즐기고 있는지  무해하고도 평화로운 시간을 누려보고 싶을 뿐이다.

 쫓고 쫓기는 동물의 세계에서 살짝 물러나 관조하는 나무늘보로 태어나는 것,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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