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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Oct 13. 2023

지방간이지만 새우깡은 먹고 싶어

양쌤의 another story 55

 [귀하의 수치는 동반질환 유무에 따라 약물치료가 필요할 수 있으므로 의사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건강검진 결과를 받고 비장한 각오로 이른 아침 안양천으로 나갔다. 걷기 딱 좋은 계절이 왔다 싶었는데 결심한 첫날부터 하필 아침 기온 10도, 여름이 지나간 후 가장 쌀쌀한 아침이다. 얇은 바람막이 하나 달랑 입었더니 목 언저리로 바람이 슝슝 들어오고 손이 시려 주머니에서 손을 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바지 차림으로 달리는 사람이 있네 하는 순간 반팔티를 입은 채 열심히 팔을 흔들며 걷는 사람들이 보이고 나처럼 웅크리고 쭈뼛거리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열심히 걸으면 안 춥긴 하겠지만...


 하...  나는 왜 이 시간에 찬바람 맞으며 이 길을 걷고 있나.

 탄수화물을 사랑한 죄,

 탄수화물에 중독된 줄 모른 죄,

 운동은 고사하고 걷지도 않은 죄.


 지금 이 순간, 가장 부러운 사람은?

 탄수화물이 땡기지 않는 자,

 탄수화물을 소 닭 보듯 하는 자,

 탄수화물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자.

 탄수화물이 몸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자,

 탄수화물을 꼭 먹어야 하는 자,

 탄수화물을 지금 먹고 있는 자.


 비알콜성 지방간이 알콜성 지방간보다 더 안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탄수화물이 지방간을 부추기고 있단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밤늦게 남편이랑 마주 보고 퍼먹던 유지방 가득한 투게더, 구구, 체리마루가 아니라면, 나의 사랑하는 스낵 3종세트-새우깡 양파링 포스틱 정도는 야식 축에도 못 끼는 귀여운 군것질이라고 생각했던  바보야! 밥을 줄이긴 했으나 밥만 줄이면 뭐 하나. 탄수화물 총량의 법칙. 빵떡면 그리고 과자.


 매년 하는 건강검진의 종합 판정 소견은 언젠가부터 한 바닥 가득이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읽어야 한다. 골고루 새로운 문제점이 추가된다. 추적검사를 해라 정밀검사를 해라 그런 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고지혈증이라니! 거미형 몸뚱이의 최후인가. 아... 고지혈증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 나쁜 콜레스테롤이 결국 표준치를 훌쩍 넘었다. 저혈압에 가까웠는데 수축기 혈압도 많이 높아졌다. 중등도 지방간에 복부 비만. 4년째 몸무게는 표준인데 체지방은 초과고 근육은 미달이다. 옷으로 가려지는 살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누가 그랬는가.


 억울하다 억울해! 맛있는 거 실컷 먹지도 못했는데. 원래 개미허리였는데 갱년기 오니 살이 막 찌더라는 지인의 말이 머릿속에서 왱왱댄다. 설마가 사람 잡는댔는데 설마가 내 근육을 잡아먹고 물렁살을 내놓았구나. 이제 설탕으로 코팅한 도넛은 한번에 하나만 먹으리. 아무리 당이 떨어진다 싶어도 와구와구 먹지 않으리. 배 부를 때 절대 드러눕지 않으리.

 3개월 후 재검을 받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움직여보기로 했다. '체지방 -3.8kg, 근육 +4.7kg'  그렇게까진 못할 것 같고 다만, 밤 11시 죄책감 없이 새우깡 한 주먹을 먹기 위해 안양천을 걷고 27층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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