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사랑은 기억되는 것

아버지가 사랑하는 동생을 떠나보냈다.

by 북청로 로데

고모는 (제주도 북제주군 월정리) 월정으로 시집을 갔지만 고향인 행원에서 서쪽 모래 언덕을 넘어 30여 분 정도 거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이제 남은 형제라고는 아버지와 고모 단둘이다. 둘째로 태어난 아버지였지만 형과 막내 동생이 사망하자 장자로서 가정의 대소사를 모두 도맡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으로 진급하던 해 겨울, 삼촌은 일산화탄소 중독 사고로 돌아가셨다.


70년대 연탄아궁이를 사용했던 가정집들이 많았던 시절에, 종종 연탄가스(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마을에서 사망 소식을 들었다. 삼촌에게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

두툼한 비단 솜이불을 온가족이 덮어쓰고 잠들 무렵 부모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바람 소리가... 무섭게 부네. 꼭 제주도에 셋바람 부는 것 같이...”

“기중이(삼촌)처가 임신한지 이제 몇 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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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들기 직전까지 부모님의 대화를 들었던 나는 그날 밤에 불던 바람소리가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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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네’ 나는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른 잠들고 싶었다.

‘오늘따라 엄마랑 아버지가 늦게까지 길게 얘길 나누신다.’ 내가 생각했다.


울산 장생포항으로 들어가기 몇 정거장 앞 대일마을에 삼양사 울산공장이 있었고, 지금도 그 자리에 공장이 있다.* 설탕공장 삼양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밝혀놓은 가로등에서 나오는 뿌연 불빛이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를 이리저리 쓰는 포댓자루 소리. 가끔씩 촤~아 하고 창문에 모래를 뿌리는 소리. 장독대에 덮어놨던 양은냄비는 엿장수 가위치듯 요란하게 맞부딛혔다. 을씨년스런 바깥 소리의 정체들이 창을 넘어 들어올까봐 나는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다 덮었다.


바싹 메마르고 차갑게 얼어붙은 긴긴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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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숙모 뱃속에 아기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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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든지 몇 시간 안된 것 같은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면서 부모님을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이어서 “경아, 삼촌한테 사고가 났단다. 갔다 올테니 동생들 보고 있어라.” 엄마는 사실 자식들을 챙길 정신도 없었지만 나한테 동생들을 돌보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아. 아아아,.... 기중아.기중아 아..” 혼이 나가 실성한 사람의 얼굴을 한채 아버지는 계속 동생 이름을 부르며 울고 계셨다. "이 무슨 일인데... 얼른 챙기소." 아버지는 엄마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빨리빨리...... 후~.후!...숨 못 쉬겠다”

동생 모습을 확인해야 하니까.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한 가닥 기대를 입에 흘리면서 두 분이 떠난 집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은 뒤 엄마와 함께 정신없이 뛰쳐나가시고 몇 분만에 집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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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왔고 새벽에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신 부모님으로부터 아직 아무 소식도 없다.



“민영아~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

잠에서 깨어 부모님 두 분 다 보이지 않자 '무슨 일인가'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둘째 동생에게 내가 말했다. 나와는 세살터울의 둘째 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삼촌이 재작년 결혼하기 전까지 동생이랑 한 방을 쓰면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 삼촌은 둘째 동생의 돌보미를 자청하고 잠자리와 공부를 봐주면서 살뜰하게 동생을 챙기셨다. 누구보다 동생이 받을 충격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가장 가까이서 함께 생활하던 삼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지? 부모님이 오셔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나눠주셔야 하는데... 시간은 멈춰버렸다.


그 날 점심시간이 지나자 엄마는 옷을 좀 챙기러 왔다고 하시며 잠시 집에 들렀다 가셨다. 아버지는 장례식장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고 했다. 그렇게 삼일장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신 두 분은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시신은 화장 후 고향 땅에 안장되었다.

아버지는 삼촌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어른들이 할 일이고, 아직 너희들은 몰라도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막내에겐 집안에 불어닥친 큰 슬픔에 대해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라도 막내 동생이 '삼촌이 왜 안 보이냐고?' 물어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세 남매는 삼촌의 장례식을 참석하지 못한 채 삼촌에 대한 슬픔을 삼켰다.


그 이후 몇 날이 지나도록 삼촌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천천히 입을 여셨다.

"기중이 삼촌이 감기가 심하게 들렸단다. 어젯밤에 따뜻하게 푹 잘 수 있게 숙모가 연탄 아궁이를 활짝 열어놓고 잤나봐? 너네도 알겠지만... 숙모가 임신한지 몇 달 됐잖아? 어제 바람이 태풍처럼 불었던게 원인이었나보더라ㆍㆍㆍ 삼촌은 약기운에 못 깨어난채 숨졌고... 숙모 뱃속에 태아는 까맣게 사산했다.. 숙모는 입원했는데 몇 일 뒤에 퇴원할거다. 어쩌냐, 사람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 아버지는 사고의 경위를 차분히 자식들에게 들려주셨다.


(내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제주 4.3 때 죽임을 당하신 사건부터 세월을 토해내듯 당신의 이야기, 앞으로 우리 가정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장기가 꿈틀거리고 눈물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심장이 아프다.



어떤 동생인데ㅡ ㅡ


할머니는 고향에 너른 집에서 홀로 계셨고 ...

아버지는 자식들 앞날에 대해 엄마와 의논하자마자 농사짓던 일을 다 내려놓고 고향을 뜨기로 하셨다.


삼촌이 그렇게 30대 후반에 요절한 이후.

"아버지가 60살 까지 살수 있겠나?" 아버지는 종종 자식들에게 물었다.


"아~ 아버지. 장수하실거예요.

왜 자꾸 육십까지 못살거라고 생갑해요?"

그럴때마다 위로하듯 안심하라는듯 자식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알았다. 60이란 숫자도 아버지로서는 최대치를 계산하신 나이라는 것을...


할아버지 나이 30대 중반. 제주 4.3 때 돌아가셨다. 맏형은 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막내동생이 허망하게 사고사를 당했다. 한결같이 마흔도 못살고 망자가 된 집안 남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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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동생이 최근 오년 전쯤 설 명절에 느닷잆이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장수하실겁니다. 아버지 손자손녀들이 이렇게 잘 크고 있잖아요^^ 솔직히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내가 60살까지 살겠나?' 하고 물으실 때마다 걱정이 많이 되더라고요. 할아버지와 형, 동생 몫으로 더 오래 사셔야죠." 동생이 어릴 때 아버지의 물음에 두려움을 느꼈다면서 이제는 아버지를 위로하고 품는다.

"그래... 고맙다."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아버지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이 집안에 남자가 아버지 외에도 많아졌다.


십년 전 어느날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냐? 그걸 어떻게 아냐?"

"살아계시지요. 그 모진 세월을 살아서, 아버지가 생각했던 목숨의 마지노선 육십살도 지났고, 하나님이 지키지 않았다면 이런 날이 있었겠어요?" "하나님은 아버지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어요~" 아버지 등을 쓰다듬으며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모진 세월을 살아온 아버지의 육중한 고통이 대못처럼 내 가슴에 박혀 울음이 목을 조여왔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거든요." 되풀이하고 반복하고 눈물이 아버지 가슴에 응어리진 고통의 못을 느슨하게 뽑아내길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