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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Dec 20. 2023

갈대

날마다 시(3)


물 댄 흙밭에 발 내리고 있었더니

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타고난 운명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올 때마다 치장을 달리했네


무심한 계절이 방문할 때면

오래된 옷장을 뒤적이며 찾아낸 옷감

연초록 진초록으로 물들인 긴 치마폭을 두르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 따라 이리 휘청 저리 휘청였네


청춘의 때가 하도 짧아

늙어서는 나뭇가지 호수 위를 떠도는 홀씨가 되었다가

마침내 한 겨울 북풍이 몰아치던 날

내 한 몸 살라던 진흙밭이 어딘지 길을 잃고 말았네


떠난 자리에 남은 갈댓잎엔

젊음도 문명도 없이

시련에 엉클어진 쑥대머리가 되어

곁을 지나던 행인의 측은한 눈빛을 받고 있네






*마음이 바쁘다는 건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것. 한 달 보름을 넋 놓고 지내다가 차가운 공기를 호흡하러 공원 산책을 갔습니다.

황량해진 연꽃 호수는 얼음 대신 녹조로 덮였고, 푸르렀던 초록을 선보였던 갈대밭엔 거인이 지나간 듯 바람에 밟혀 이리저리 꺾인 갈댓잎들이 널브러져 있더군요. 겨울은 참 매정하기도 합니다. 매서운 한파가 지날 때면 지혜로운 나무들은 그렇게 겸손히 자신을 죽이고 정체를 숨기며 그 자리에 조용히 숨만 쉬는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과 닮았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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