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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Dec 22. 2023

목화솜이불

날마다 시(5)


누런 콩밭 그늘에 잠든 아이 눕혀놓으니

현무암 화산송이 구멍으로 흘러드는 실바람에

연한 머리에 얹힌 몇 가닥 무명실이 흔들릴락 말락

모친은 물질하러 바다로 가고

할머니는 귀한 아기 바구니에 눕혀 밭으로 왔다


딸자식 혼인 날을 받아 든 어미는 육지로 떠나는 상인 편에

혼수 이불 만들려고 삯을 주었다 

은실 색실로 십장생을 수놓은 양단 천을

가로 다섯 자, 세로 여덟 자로 제단하여

딸자식 내외 백년해로 하란 마음을 한 땀 한 땀 기웠다


출가외인 딸아이가 모진 생활에 허리가 휘어가니

어미는 밭일하러 가는 등허리에 바구니를 짊어졌지

실바람 한들한들 돌담 안을 휘돌아다니면

어미는 누런 콩잎 뜯어 옷으로 대충 닦아

새벽에 지어온 조밥을 된장 얹어 콩잎에 싸서 요기를 달랬다



어미는 세상을 떠나시고

당신이 손수 지어 만들어 보낸 비단이불은

매년 겨울이 돌아올 때에

밭고랑 구석에서 잠들었던 손녀가 덮고 자니

옛날 옛적 어미 마음은 잠든 손녀의 꿈에나 나올까





*원단 기술의 혁명으로 시대에 뒤처진 구식이 된 양단 이불과 요. 몇 해 전 겨울부터 엄마 혼숫감으로 할머니가 지어주셨다는 비단 이불을 덮고 잔다. 오늘은 이곳 남쪽도 체감온도 영하 9도. 최근 들어 가장 추웠던 하루이다. 목화솜 넣고 비단천으로 이불과 요를 이쁘게 마감한 무거운 옛날 이불이 요긴한 날이 된다. 잠자다 뒤척일 때도 목화솜 무게 때문에 떡메를 치듯 힘겨울 때도 있지만 겨울에는 이 이불을 포기할 수 없다. 나의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셨고, 흰머리 염색해도 젊어지지 않는 허리와 무릎에 시름이 깊어가는 엄마의 황혼을 지켜보며 살고 있다. 할머니와 엄마와 나까지 삼대를 이어주고 있는 양단 한복감을 잘라 만든 이불을 쳐다보다가, 엄마에게 들었던 할머니의 콩밭 이야기가 떠올라서 몇 글자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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