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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Oct 13. 2023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마라톤

마라톤 훈련 12주 차

마라톤 훈련 12주 차
4마일 이지페이스
6마일 템포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 마라톤


지난주부터 아팠던 다리 때문에 달리기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같이 훈련을 시작한 친구들이 18마일을 뛰고 20마일을 뛰고... 마일리지를 늘려가는 것을 초조한 마음으로 구경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지금 허투루 다리를 썼다가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뉴욕마라톤이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칭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주말에 큰 비가 내린 후 다시 기온이 올라갔다. 그 덕분인지 아픈 다리가 조금씩 낫기 시작했고 화요일에는 조금 달려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늘 하는 그룹 트레이닝은 단거리 스피드 훈련을 하기 때문에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고, 기온이 충분히 오르기를 기다려 아침 9시쯤에 6km 정도 (4마일) 가볍게 뛰었다.

업힐을 오를 때나 단차가 있는 곳을 지날 때 조금 불편한 느낌이 여전히 있었지만, 이 정도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달리기를 다시 할 수 있다고 판단, 훈련을 재개하기로 했다.



목요일에는 조금 속도를 내서 6마일을 달리고 훈련 종료.

이제 뉴욕시티 마라톤 전 마지막 대회인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만이 남았다.




일요일 :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
맨하탄에서 스테튼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 터미널 / 이번 대회에서 E그룹 배정을 받아 처음으로 wave1에서 출발했다


뉴욕 5구 시리즈 중 마지막으로 열리는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마라톤. 뉴욕시티 마라톤(풀코스) 전 마지막으로 열리는 대회다. 이 대회는 뉴욕시티 마라톤의 출발시점인 스테튼 아일랜드에서 열리기 때문에, 실제 대회날 아침 일정을 예행연습 한다고 보면 된다.



뉴욕시는 5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다.

맨하탄, 브루클린, 퀸즈, 브롱스, 그리고 스테튼아일랜드이다. 이 중 브루클린과 퀸즈는 이어져있고, 맨하탄과 브롱스 사이에는 강이 있기 때문에 맨하탄도 엄밀히 말하면 섬이지만, 스테튼 아일랜드는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있는, 진짜 섬이다.

뉴욕의 다른 지역에서 스테튼 아일랜드에 가는 방법은 딱 두가지인데 브루클린에서 베라자노 브릿지를 통해 건너가는 방법이 하나이고, 맨하탄에서 페리를 타는 방법이 나머지 하나다. 베라자노 브릿지는 자동차 전용 다리라서 걸어서는 건널 수 없고 택시나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다.



뉴욕시티 마라톤 당일날은 주최측이 제공하는 버스 또는 스테튼 아일랜드 페리(이것도 주최측이 특별편성을 제공한다)를 타고 스테튼아일랜드에 들어가 대기하다가 출발한다.



그래서 뉴욕 5주 시리즈 중 마지막으로 열리는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는 대회 당일 아침을 방불케한다. 페리 터미널에는 이른 아침부터 러너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회 규모가 크다보니 시큐리티 검사도 해야하고, 짐도 맡겨야해서 아침 일찍 서둘러야한다.



날씨가 추운데다 새벽같이 나가야해서 옷을 어떻게 입을지 많이 고민되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에는 몸에서 열이 나서 추위를 느끼지 않지만, 대기 시간이 긴 대회는 체온유지에 신경을 써줘야한다. 그래서 뉴욕시티 마라톤 날에는 (출발그룹에 따라서는 대기시간이 5시간에 이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옷을 겹겹이 껴입고 가서 출발 직전에 다 벗어서 놓고온다고 한다. 그러면 옷 수거를 담당하는 자원봉사팀이 모두 수거해 기부 또는 재활용된다.



하프마라톤때는 그렇게까지 지원해주지 않기 때문에 옷을 벗어서 "버리고"오기도 좀 마음이 그렇고, 좀 춥더라도 아직 10월 초입이니 깡으로 버텨보자 하고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나갔다. 지난번 대회까지는 크롭탑을 입었는데 상체가 추위를 더 많이 탈테니 크롭은 못 입겠고 반팔 정도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웬일. 집에서 나가자마자 "어으 춥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대로 스테튼 아일랜드까지 갈 수나 있을까 싶을만큼 춥고, 게다가 거기는 섬이니 바람도 더 많이 불텐데 이렇게는 못가지 싶어서 다시 집에 들어와 긴바지 레깅스로 갈아입고 다시 집을 나섰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데 긴바지인데도 추웠다. 역시 갈아입고 오길 잘 했다는 생각에 흡족했다. 스테튼 아일랜드에 도착해서 겉에 입고간 자켓을 벗고 천원짜리 얇은 비닐 우의를 겉에 입은 다음 가방을 맡겼다. 하프마라톤을 처음 뛰어봤을때는 쓰레기봉지(;;;)를 입었는데, 되게 좋은 생각인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렇게 입고 오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어서 그 다음부터는 우의를 이용한다.



비닐 우의를 입었는데도 추워서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대기했다. 다리가 아직 깔끔하게 나은것이 아니라서 스트레칭을 꼼꼼히 하면서 웜업에 신경썼다. 기운이 넘치는 (잘 뛰는)러너들은 웜업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나는 보통 하프마라톤은 따로 웜업을 뛰지 않고 처음 1마일을 웜업이라고 생각하고 뛰는 편이다.



출발시각이 되자 핸드사이클이 먼저 출발하고, 국가 제창 후 앞에서부터 출발했다. NYRR의 큰 대회는 웨이브를 2개로 나누어 출발하는데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도 8시에 출발하는 wave 1과 8시 45분에 출발하는 wave2로 나뉜다. 브루클린 하프때 wave2 A조를 배정받고 다음에는 기필코 wave 1에 들어가리라 주먹쥐고 다짐하던것이 드디어 이루어져, 이번에는 Wave 1 E조에서 출발했다.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마라톤 코스맵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마라톤은 반환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피니쉬하는 구조인데 완전히 같은 길을 갔다가 되돌아오는게 아니라 15Km 이후부터 코스가 약간 달라진다. 그리고 고저차 맵에서는 15km 이후가 그다지 어려울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 뛰어보면 좌우로 턴이 많고 짧은 언덕이 반복적으로 나와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 굉장히, 힘들었다.



내가 왜 15km 이후를 특히 강조해서 힘들었다고 쓰느냐 하면,

내 애초의 계획이 15km까지는 천천히, 그리고 다리 상태를 봐서 15km 이후에 스퍼트. 였기 때문이다. 약 9마일 지점까지 편안한 페이스로 뛰다가, 만약 다리에 큰 통증이 없고 해볼만 하다면 마지막 4마일을 바짝 당겨 뛰어서 1시간 51분에 피니쉬 할 수 있으면 한다. 가 바로 나의 계획이었다.

이 1시간 51분은 바로 출발그룹 D의 컷트라인이다. (나는 현재 E)



하지만 다리 통증이 도지면 출발그룹 D고 나발이고 다음달 뉴욕시티 마라톤을 못 뛸 수 있기 때문에 초반에는 무리하지 않고, 8마일 지점에 있는 엄청난 오르막을 다 오른 다음에 스퍼트를 해보기로 했다. 고저차맵 상으로 8마일 지점의 언덕만 지나면 대부분이 내리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획한대로 9마일 지점까지 통과를 했고(오히려 계획보다 조금 빠르게 통과), 시간을 계산해본 결과 마지막 4마일을 이 악물고 뛰면 1시간 51분이 가능해보였다. 그래서 스퍼트를 시작하는 순간, 짧지만 강력한 한방의 언덕.

또 한방의 언덕.

또 한방의 언덕이 자꾸 자꾸 나타났다. 게다가 왼쪽 오른쪽으로 꺾으며 뛰는 구간이 많아 발목에도 무리가 가고 심리적으로 거리가 길게 느껴지면서 빠르게 지치기 시작했다.



브롱스에서 10마일을 뛰면서, 물론 마지막 1마일은 정말 힘들었지만 '이 페이스대로 3마일을 더 뛰라고 하면 뛸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봤을 때 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스테튼 아일랜드에서 D그룹 컷트라인 안에 들어갈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어느정도 있었다.



빠르게 지치기 시작했고, 코스는 지지부진하게 왼쪽 오른쪽으로 꺾이고, 언덕은 자꾸 나오고, 페이스가 쳐지는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그 타임이 온다. 현자타임도 아니고 그건 뭐라고 해야할까 스스로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관대타임이다.



이런 언덕에서 속도 내다가 다리 아픈거 도지면 어쩌려고? 뉴욕시티 마라톤 앞두고 여기서 다치면 되겠어? 다음 주말에는 20마일 훈련도 해야되는데 지금 기운 빼면 안되는거 아닌가??? 아휴 지금 이 페이스대로 들어가도 하프마라톤 개인 최고기록(PB)인데?? 게다가 바지는 왜 자꾸 흘러내리고 볼썽사나우니 옷매무새도 좀 고치고 저 앞에서 잠시 서서 게토레이나 한잔 마실까? 등등... 천사같은 나 자신이 나타나버린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4마일에서 스퍼트해 1시간 51분 내에 피니쉬 "할 수 있으면 한다"던 두루뭉실한 계획은, 애초에 '못할것 같으면 말고'라는 달콤한 단서조항이 있었던 탓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꺾여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목표는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1마일단위로 팔뚝에 볼펜으로 적어가며 투지를 불태워도 될까말까라는 것이다.



하- 할 수 있으면 한다니. 애초에 할 생각이 없었던거였다.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하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에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감사도 하고 (??), 그래도 뉴욕마라톤 앞두고 다치지 않고 통증 없이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1시간 55분 5초 피니쉬.





말은 이렇게 대강 뛴것처럼 해도, 정확히 1년전에 뛰었던 코닝 하프마라톤 2시간 10분에서 무려 15분이나 단축한 개인 최고기록이다.



올해에 체력과 기록이 눈부시게 향상된 나로써는 그 대미를 D그룹 배정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하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그리고 이 아쉬움은 정확히 이틀후에 "애석함"으로 업그레이드 되는데.....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를 마지막으로 NYRR는 모든 러너의 기록 수집을 마감하고 11월 5일에 열릴 올해 뉴욕시티 마라톤의 출발그룹을 배정했다.

뉴욕마라톤은 핸드사이클, 핸디캡 러너, 여자 선수, 남자 선수, 일반부 순으로 출발한다. 일반부는 기존 기록 기준으로 속도가 빠른 사람부터 wave 1부터 5까지. 그리고 각 웨이브는 A부터 F까지 6개의 그룹으로 다시 나뉜다.



그리고 내가 받은 그룹 배정

wave 3, A


그렇다.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에서 조금만 더 잘 뛰었어도 wave2가 되는거였는데...

다치면 안된다, 힘빼면 안된다, 아니 단순히 코스가 좌로 우로 자꾸 꺾여서 귀찮고 성가시다는 이런저런 핑계로 스퍼트를 하지 않은 나는 wave3 선두가 되었다..... 뭔가 뿌듯해야하나 아쉬워야하나 잘 모르겠는 찝찌름한 기분과 더불어, 아무리 그래도 모든 대회는 최선을 다했어야했다는 후회가 조금 들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wave3 A였다면 오히려 상쾌했을것 같다.




좀더 열심히 뛰었더라면... 좀더 바짝 당겼으면 아마 달랐을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석연찮은 기분이 계속 따라다니는 지난 며칠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나간 대회를 다시 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만에하나 최선을 다해 "빡세게" 뛰다가 어딜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휴. 아찔하다.



살면서 한번도 자발적으로 달리기라는걸 해본적도 없고, 잘 해본적은 더더욱 없었다.

초심을 되찾고, 기록이나 그룹에 욕심내지 않고, 건강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즐겁게' 대회를 마칠 수 있도록, 앞으로 남은 훈련도 성실히 해 나가자... 다시한번 다짐해보는 계기로 삼았다.




뉴욕 5구 시리즈 중 4개를 완주하고 받은 메달 4개 (첫번째였던 NYC 하프마라톤은 참가 추첨에서 떨어져서 못 뛰었다)





그리고 옷!

춥다 춥다 떨며 긴바지로 갈아입기까지 하고 간 정성이 무색하게도, 출발하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웜업이 되면서 딱히 추위를 느끼지 않은것은 물론이요, 바지는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반팔티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몸 구조가 문제인지 바지는 뭘 입어도 뛰다보면 흘러내리는데, 허리 밴드만 살짝 당기면 되는 반바지와 달라서 긴바지 레깅스는 발목에서부터 영혼까지 끌어당길 기세로 훑고 올라오며 당겨줘야만 추켜진다는 사실을 잊고있었다 ㅠㅠ

게다가 땀이 나기 시작하니 한번 흘러내린 바지가 그대로 다리에 붙어서 추켜올리기가 쉽지도 않았다.

나시와 반팔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도 그 작은 천조각 조금 더 붙었다고 겨드랑이가 조여드는듯 불편했고, 특히나 몸에 딱 붙는 크롭이 아닌 셔츠를 입으니 땀에 젖은 옷이 철썩철썩 몸에 붙었다 떨어지는게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물론 평소 달리기때는 크롭만 입고 뛰는 일은 없고, 반팔티에 긴바지 레깅스를 자주 입는다. 하지만 비교적 긴 거리를 뛰어야하는 하프마라톤, 특히나 대회때는 온몸의 감각이 더 예민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누구랑 대화를 하는것도 아니고, 딱히 볼거리도 없는 한적한 스테튼 아일랜드의 시골길이라 그랬는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서 불편하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래서, 앞으로 아무리 추워도 대회때는 반바지에 크롭을 입기로. 절대 잊지말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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