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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Feb 08. 2023

결혼 17주년

새롭게 시작한 일에서 성공을 맛보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그리 크지 않은 교회를 꾸려나가는 친구 녀석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고수하기 위해 남자 교인은 자기가, 여자 교인은 재수 씨가 따로 담당한다는 말에 조선이 멸망한 지 100년이 더 지났다는 말로 응수했다. 

"니가 뭘 몰라서 그래."

"얌마, 내가 모르긴 뭘 몰라?"

"그게 말야. 진짜 사람들 사는 게 장난이 아니야, 장난이!"

"뭐가 장난이 아닌데?"

"몰라서 그러는 거지?"

"그럼, 한국을 떠나 산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나야 모르지. 뭐 같은 방에 함께 앉아있기만 해도 문제가 생겨? 요즘은?"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또 구다야?"

"구다가 아냐, 임마."

"구다가 아니면 뭔데?"

"그니까, 얼마 전에 처가 여자 교인 한 명이 상담을 요청해서 그 집에 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거든. 또 처가 다른 이의 이야기 들어주고 하는 걸 좀 잘해. 그러니까 마음도 놓였고 긴장끈도 풀었던 거지."

"... 그래서?"

"처가 이제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니깐 그 여자가 이랬단다. "사모님, 사모님도 남자 친구 한 명 안 필요하세요? 필요하시면 언제든 제게 말씀하세요. 좋은 사람으로 소개해줄게요." 물론 처는 그딴 거 필요 없다고 웃으면서 사양했지. 그니까 하는 말이, "요즘 시대에 남자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끔 바람 쐰다 만나면 좋아요. 데이트도 하고." 간통죄가 폐지됐잖냐."


녀석이 나에게 전하려던 요지는 요즘 부부는 자녀를 낳아 엄마와 아빠가 되었지만 스스로 결정하여 창조한 가정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다였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살다 보니 내 짝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결혼할 때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깨달았고, 주변을 둘러보니 평생 함께 살 사람과 가끔 만나 잠깐 바람만 피기에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다른 이로 바꿀 수 있는 사람, 이렇게 두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가 한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이상과 현실 사이 그 거대한 간극에 대한 깨달음에서 발생하는 실망감과 고독감을 익숙하지 않은 걸 갑작스레 행할 때 뇌에서 보내는 복잡 미묘하지만 짜릿한 감정인 '사랑'이란 화학 작용으로 잊으려고 애쓰다 보니 너나 할 거 없이 바람을 피우며 사나 보다. 바람을 피운다는 말이 재밌다. 담배는 피울 수 있다. 담배 한 개비가 재가 되어 천천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면서 재로 변한 부분을 손가락을 톡톡 쳐서 재떨이에 담을 수 있다. 담배 한 개비는 피고 나더라도 재는 남는다. 내가 담배를 폈다는 걸 재떨이 담긴 재를 보고 알 수 있다. 바람은 담배와 다르다. 피면서도 지금 뭘 피는지도 모르고 피고 나더라도 남는 게 없다. 바람처럼, 운명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겠지만,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게 불륜(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만남)이기에 '바람피운다'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2023년 2월 4일. 오늘은 한 여인과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은 지 정확하게 17년 되는 날이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立春)에 난 한 여인과 결혼(結婚)했고, 26년간 너무도 다른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삶의 양식에 따라 살아온 두 가지 다른 삶을 엮어 하나의 삶으로 만드는 연금술 훈련을 시작했다. 얼마 전 두 아들에게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했다.


"야,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자. 엄마랑 아빠는 결혼해서 둘이 되었지. 그치? 그런데 살다 보니 너네 둘이 태어나서 이제 넷이 된 거야. 처음에는 하나였고, 결혼해서 둘이 되었는데, 다시 너희 둘이 태어나서 넷이 되었지. 처음에는 2, 나중에는 4. 24. 기억하기 쉽지?"


17년이란 세월에 위기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더라면'라는 부끄러운 기대를 품었던 적도 있었고, 쓸데없는 데 한눈팔다 처에게 들켜 마음 순화 교육에 전념하며 마음으로 무릎 꿇은 적도 있다. 하지만 17년이 꽉 채워진 오늘 난 지난 17년간 한 여인과 한 가정을 이뤄 두 아들을 낳아 여기까지 꿋꿋하게 살아온 내 삶에 자랑스럽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되었고, 둘은 서로 사랑하여 넷이 되었다. 생명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고, 생명만이 생명을 키울 수 있다. 살아있는 건 따뜻하다. 한 여인과 함께 살아낸 17년이란 세월에서 난 살아있다는 건 따뜻하다란 진실과 생면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변하지 않는 진실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난 이 17년을 세상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거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먼 훗날 내가 내 삶을 마무리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지금 내가 사춘기와 20대 초반에 관한 나를 생각할 때마다 시린 마음속 상처를 더 헤집어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 여인과 시작하여 두 아들과 함께 살아온 17년은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더 섬뜩했지만, 그 어떤 인생 영화보다도 더 감동적이었고, 그 어떤 활극보다도 짜릿한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행복했다. 앞으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현민에게, 

17년이라... 우리 둘은 예상치 못한 반전에서 또 다른 반전을 거듭한 후 결혼했고, 동시에 시작한 새로운 삶은 괌, 한국, 미국이란 세 곳을 오가며 긴박하게 흘러갔습니다. '이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러다 보니 둘은 넷이 되었고, 우리 넷은 하루하루 사소한 신경전에서부터 고함소리로 우위를 점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세력 다툼으로 치달으며 세계 평화는 가정의 평화에서만 이룩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숫자 17은 '새롭게 시작한 일에서 성공"을 상징하답니다. 17년이란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지만, 이 17년을 그 어느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어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 전하려고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할 말은 다했으면 끝내라. 사랑합니다. 

2023년 2월 4일에. 
남편 광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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