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세영 Feb 12. 2021

유난히 조용한 집콕 명절을 보내며

우리 가족의 유난스러웠던 명절풍경을 돌아본다.


코로나 이후 작년 추석 명절에 이어 두 번째 명절을 맞이한다. 작년 추석에는 조상님 산소에 모여서 성묘를 지내는 것으로 간단하게 보냈었다. 이번 설 명절은 4인 이상 집합 금지로 인해 그마저도 모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 2주 전쯤에 미리 연화장과 산소에 다녀왔다. 결혼 후 처음으로 집에서 명절을 보낸다. 조용한 명절이 그리 낯설지가 않다. 지난 1년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집콕 생활을 보내다 보니, 거리두기 행사가 자연스럽다.


그래도 명절에 집콕이라니, 조금은 허전한 마음이 든다. 대가족인 우리 가족은 언제나 북적북적 떠들썩한 명절을 보내왔다. 특히, 우리 가족에게 구정 연휴는 다른 가족들보다 좀 더 길고 유난스러운 가족행사 주간이었다. 음력 1월 3일이 아버님 생신이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십 수년의 시간 동안 구정의 가족모임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4형제 식구들이 수원에 있는 아버님 댁에 모여 분주하고 바쁜 행사를 치른다. 큰 형님댁 식구들, 둘째 형님댁 식구들, 셋째인 우리 식구들, 막내동서 식구들 모두 하루 전 날 모인다. 여자들은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를 시작한다.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재고, 나물을 무친다. 쉴 틈 없이 전을 부치고,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서러운 건 여자들이 바쁘게 일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거다. 시댁에서의 명절 일은 당연하게도(?) 며느리들의 몫으로 귀결되었다.


명절모임엔 음식 준비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있다. 바로 대가족의 식사 준비와 설거지다. 명절 음식을 준비하고, 식구들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다 보면 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일은 밤이 늦도록 끝나지 않았다. 엄청난 음식을 먹고, 어마무시한 양의 설거지를 한다. 모든 형제들 집이 한 시간 이내의 거리로 그리 멀지 않지만, 거의 다 같이 잠을 잔다.(방 3개와 거실에 나누어서 잔다.) 명절 당일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제사상은 (지금이야 한 상으로 줄어들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두 개의 상에 다리가 휠만큼 올렸다. 그러곤 다시 차례를 지내기 위해, 큰 어머니가 계신 큰댁으로 이동한다. 큰댁 큰어머니, 큰 형님댁 식구들, 둘째 형님댁 식구들에 우리 4형제 식구들과 아버님, 작은 아버지 식구들. 모두 모이면 그야말로 대식구가 따로 없다. 


어른들만 많은 게 아니라 한 집에 아이들이 거의 둘 씩 있다. 그렇게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차례음식을 먹는다. 며느리들이 다 같이 합세해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는 동안 시댁 어르신들과 남자들은 거실과 이방, 저 방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쉬면서 기다린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설거지가 끝나면 대가족의 세배 시간으로 마무리를 한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 같이 모여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한다. 조상님 산소 3군데를 돌고 음복을 한 후에, 큰 댁 식구들과 헤어진다. 


여기서도 끝은 아니다. 그다음 코스는 연화장이다. (몇 년 전부터인가 연화장 정체가 너무 심해서, 미리 갔다 오고 있지만) 아버님과 우리 4형제는 어머니가 계신 연화장에 가서 한 번 더 어머님 제사를 지냈다. 대가족의 연중행사와 만남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써본다. 하지만 명절 행사의 스트레스와 피곤이 글을 쓰면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이제 끝인가 보다 싶지만, 사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 아버님의 생신잔치상 준비를. 




구정 명절보다 우리 가족에게 더 중요한 특급 행사. 바로 아버님 생신잔치 준비에 돌입한다. 한해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던 가족행사다. 명절이 끝나고 나면 솔직히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행사 준비를 시작한다. 새롭게 장을 보고, 다시 새로운 메뉴로 음식 준비를 한다.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은 친정에도 못 가고 해마다 스트레이트로 일을 하시곤 했다. (그러다 보니 친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에 모일 때면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아버님 생신파티엔 아버님의 친구분들과 시댁의 어르신들, 이틀 전에 뵈었던 큰댁 식구들 모두가 다시 아버님 댁에 방문하신다. 왜 그렇게 해마다 잔치를 크게 벌이실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원래부터 늘 해오던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안 하면 오시던 분들이 서운해하실 거라고 말이다. (과연 그럴까에 대해서는 적지 않기로 하자.) 그나마 결혼 초창기 때는 손님들이 오시는 시간도 들쭉날쭉했다. 점심부터 저녁 사이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손님상 접대가 만만치 않았다.


결혼 후 처음 몇 년간은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일을 했다. 여자들은 음식을 차리고, 남자들은 상에 앉아서 먹기만 했다. (아니, 손님접대를 했다고 적어야 좋겠다.) 그릇마다 반찬이 수북해도 고기나 국이 떨어지면, 끊임없이 오가며 리필을 해주어야 했다. '얘야! 여기 국 떨어졌다!'를 외쳐대시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시댁의 풍습만은 조선시대로 회귀한 것 같았다. 명절이 끝나고 나면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첨단을 달리는 세상인데, 가족의 문화는 어째서 바뀐 게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명절인가 싶었다.






시댁에서 명절을 보낸 지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 시댁의 명절 풍경은 놀라울만큼 달라졌다. 우선은 일이 그리 어렵지 않고 빨리 끝난다는 것이다. 큰 형님, 작은 형님, 막내 동서 모두 행사를 치르는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가 되었다. (왠지 나는 아직도 한참 어설프지만 말이다.) 


가장 많이 달라진 건, 이제는 남자들도 모두 함께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합류하기 시작했다. 재료 손질이나 전 부치는 것을 돕고, 설거지, 청소는 모두 남자들이 한다. 식사 준비에 드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아주버님들이 나서서 배달음식을 주문해주신다. 덤으로 커피 커비스까지. 설거지도 줄고, 스트레스도 줄었다. 저녁을 먹은 후엔 산책도 하고, (지금은 못 가지만) 같이 노래방에도 간다.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변화는 서서히 찾아왔다. 명절이 끝나면 카톡을 통해 '다들 고생 많으셨다. 애쓰셨다. 고맙다.'는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따뜻한 덕담을 주고받는다. 어느 한 사람 크게 소리 높여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문화는 서서히 변해왔다. 가족 모두가 조금씩 마음을 내고, 조금씩 다른 행동을 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 해 한 해 스트레스 가득한 명절을 보내며, 좀 더 담백하고 즐거운 명절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들끼리 모여서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것이 아닌, 조상님의 음덕을 기리고, 효도와 우애를 나누는 즐거운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돌아보니 어느덧 우리 가족의 문화가 점점 그렇게 변해왔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올해는 아버님 생신을 못챙겨 드리게 되었다. 대신 아버님 친구분과 함께 여행을 보내드리기로 했다. 아버님 생신을 우리끼리 단출하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아예 모임 자체가 불가능해졌지만 말이다. 


코로나로 강제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되니, 북적대며 일하던 풍경이 조금은 그립기까지 하다. 지글지글 전을 부치고 일하던 명절의 풍경이 추억이 되어 떠오르기까지 한다. 내년의 명절은 어떤 모습일까. 불필요한 것들은 점점 더 덜어내는 방향으로. 존중하지 못했던 것은 점점 더 존중하는 방식으로. 스트레스가 가득한 방식에서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금씩 변해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이 글을 빌어, 시댁 식구 모두에게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큰 걸 보니, 그동안 내가 받은게 참 많은 것 같다.)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