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뭘 못하냐고 물으면 금세 대답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바느질을 못한다. 중학생 때 기술가정 시간에 바느질이 채점 항목이었는데,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반면, 나는 50점을 받았다. 나름 열심히 했지만 누가 봐도 삐뚤빼뚤했기에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냥, '나는 바느질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넘겼다.
또 나는 날짜를 꼼꼼히 확인하는 일을 잘 못한다.
모임을 운영하면서 자주 실수했는데, 예를 들어 '11/21(목)'이라 표기해야 할 것을 '11/21(수)'로 쓰곤 했다. 분명 두세 번 확인한 것 같은데도, 업로드한 후에야 틀린 걸 알아차렸다. 개인적인 모임이라면 '수정할게요!' 하고 넘기면 되지만, 회사 업무였다면 심각한 실수였다. 실제로 진땀 흘린 적도 있다.
내가 또 잘 못하는 건 ‘뻔뻔하게 부탁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아양 섞인 말투를 쓰는 걸 잘 못한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나마 애교를 부릴 수 있지만, 낯선 외부인에게는 나무 인형처럼 굳어버린다. 장녀 기질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그저 뻣뻣하다.
표정을 숨기는 일도 어렵다.
기쁜 일이 생기면 아이처럼 좋아하고, 슬프면 낙담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표정 관리를 연습해보기도 했지만, 머릿속이 바쁜 나로선 얼굴까지 관리하려니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이젠 포기했다. 차라리 기쁜 일은 함께 나누고,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은 그냥 생각 없이 말했겠지’ 하고 넘기기로 했다.
이렇듯, 못하는 일은 금방 적을 수 있다.
하지만 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며 감정이입하는 건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그걸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혹은, 나는 빠른 시간 내에 소설을 써내려가는 걸 잘하지만, 그 글이 재미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결국 나는 나에게 꽤 엄격한 사람이다.
남이 잘 되면 기꺼이 축하하지만, 내가 이룬 건 그냥 ‘과정일 뿐’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축하하지 않는다. 전자책이 처음 나왔을 때도, 소설이 우수상을 받았을 때도 그저 ‘운이 좋았던 거야’라며 내 실력을 의심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까 봐 조심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글쓰기 모임을 세 개나 운영한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좋은 모임장'이라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글을 더 잘 쓰기 위해,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했을 뿐이었다. 나는 본질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글쓰기엔 반응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임이라는 형식을 빌려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잘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다.
나는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새로운 사람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고, 빠르게 이야기를 써내려갈 줄 아는 사람이며, 낯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 인상 깊은 문장을 곱씹어 내 표현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잘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걸 내 입으로 말하기가 겁났던 것뿐이다. 내가 ‘잘한다’고 말한 그 일이 누군가에겐 하찮게 느껴질까 봐. “너 그거 잘 못해”라는 말을 들을까 봐. 그건 결국 인정 욕구와 두려움이 만든 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잘하는 무언가를 스스로 인정해도 괜찮다. 객관적인 기준이 꼭 필요하지 않다. 그건 당신이 잘한다고 생각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마치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꽤 능숙하다고 믿는 것처럼.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어쩌면 당신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당신의 오늘이 내가 무사히 지나온 하루처럼 평안하길 빈다.
나의 오늘도, 당신만큼 안녕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