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 수는 없을까? 아니다. 그렇게 살 수 없다. 단언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마냥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낼 순 없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수용하고 포용한다 해도 한계는 존재하고, 결국 그 한계에 부딪히면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걸 받아들이기보다는 내가 정한 기준선 안에서만 수용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 있다. 번아웃이 자주 오는 사람은 인정 욕구에 목마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 직장에서 내가 해낸 일이 잘 되어야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 그래서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만 매번 최고의 결과가 나올 수는 없으니, 결국 번아웃에 이른다는 내용이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 역시 그랬다. 직장생활 내내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했고, 외부의 인정으로 나를 증명하려 애썼다.
모든 일을 잘하기란 어렵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부족한 점이 많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적당한 결과물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들인 시간에 비해 결과가 잘 나올 때 특히 뿌듯함을 느꼈다. 한 가지 일에 모든 걸 쏟아붓는 시기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알게 됐다. 노력할수록 기대치가 높아지고, 기대치가 커질수록 실망도 커진다는 것을. 그래서 ‘적당한 노력으로 적당한 결과를 얻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적당함’ 덕분에 자주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나보다 유능한 후배들의 빛나는 재능이었다. 고작 적당한 노력을 들였으면서도,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모습에 질투가 났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결국 이 모든 공은 네가 가져가겠지’ 싶은 생각에 배가 살살 아파왔다. 선배답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쪼잔한 마음이었음을 인정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나는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알았고, 그래서 주변에 도움을 잘 요청했다. 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도움을 구해 100%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건 내 강점이라 여겼다. 실제로 협업이 중요한 직장생활에서 혼자서만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 시간과 일에 치이다 보면 누구든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내가 도와주고 때로는 도움을 받으며 그렇게 일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어느 날 “성과 기여도를 따지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였다. “이건 팀의 성과니까 다 함께 만든 거다”던 말과는 상반된 기준이었다. 공동대표 중 한 명이 나간 뒤, 마케팅에 전혀 관여하지 않던 다른 대표가 갑자기 수치화된 결과를 요구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는 정성보다는 정량, 모호함보다는 숫자를 원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속에 삐딱한 잣대를 하나 품은 채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 대표의 문제였는지, 후배가 잘난 게 내 탓인지, 내가 도움을 구한 것이 잘못된 것인지… 나는 그것들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모든 걸 함축한 채로 직장생활을 하며 점점 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나는 꽃과 바람과 낙엽을 좋아하고, 무용하고 무능한 것들에 마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햇볕을 쬐며 창가에 기대 쉬는 고양이처럼.
3년 넘는 시간 동안 마케터로 일했다.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성과를 요구받았고, 후배들은 경주마처럼 달리며 나를 앞질렀다. 내가 존경하던 사람은 메말라 갔고, 점점 타인의 고통에 무뎌졌다. 나는 자주 위통을 앓았고, 책상에 앉아 한숨을 쉬었으며, “얼굴이 안 좋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처음엔 그게 단지 내가 나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못 버티는 걸까 싶었다. 스스로를 질책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그 일이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사람의 감정, 웃음, 미소, 아픔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KPI, OKR, 전환율, 성과 수치… 그런 것들에 목을 매고 있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몸에 안 맞는 일을 당장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억지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 우리에겐 분명히 있다. 마케터라는 옷이 내겐 잘 맞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당신을 힘들게 하는 이유가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그 일이 당신과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주 월요일이 괴롭고, 월요병이 실제 위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건 당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여전히 잘 버티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 이토록 지치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붙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잘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