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반주 #01
제목은 와인을 먼저 썼지만, 사실 시작은 클램차우더였습니다. 요즘 판교에 아주 핫한 브런치카페가 있다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터라, 도대체 무슨 음식을 하길래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찾아보게 되었죠. 차마 주말 아침 10시부터 웨이팅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랜선 탐방이라도 하자 하고요. 라자냐, 파스타, 미트볼 등 '음 그렇구나~'할 음식들을 보고 있는 와중에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로 모든 테이블에서 시키는 수프, 클램차우더(Clam Chowder)였습니다.
'차우더(chowder)'는 감자를 넣어 걸쭉하게 끓이는 수프로, 여기에 조갯살이 들어간 것이 바로 클램차우더입니다. 겉보기로만 다시 이름을 붙여보자면, 조개 감자 크림수프 정도면 되려나요? (저는 사실 여기 감자가 들어가는지 요리를 해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요리이지만(!) 저에게는 막연하게 맛있을 것 같은 요리였는데, 블로그 포스팅을 보던 저는 갑자기 요리 열정 스위치가 켜져 버렸습니다. 이 스위치의 작동법은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바로 그 주말, 클램차우더를 만들게 됩니다.
먹어본 적도 없는 요리를 만들겠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무모한 행동이 아닐 수 없는데 왠지 모르게 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적당히 조개맛이 나는 크림 수프겠거니 생각한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러 가지 블로그 레시피와 국내외 유튜브 레시피 영상을 참고해서 아주 맛있는 수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게 통상적인 클램차우더 맛이 맞는지는 다음에 레스토랑에서 꼭 확인해봐야 할 것 같지만요.
바지락에 감자, 샐러리, 샬롯(양파 대용), 브로콜리, 우유, 생크림, 밀가루, 버터, 타임(thyme), 소금, 후추, 관찰레(베이컨 대용)가 들어간 수프는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한 요리였습니다. (혹시 레시피가 궁금하시다면, 저도 요리할 때 정확한 계량은 안 하고 어림짐작으로 만들어서 레시피는 다른 분의 것을 활용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아주 따뜻하고, 뭉근하고, 부드럽고, 향긋한 수프 한 그릇이 뚝딱!
그리고 이 수프 한 그릇의 완벽한 반주는, 미국 샤도네이였습니다. 나름 클램차우더가 미국의 대표 요리라고 해서 미국 화이트 와인을 선택한 저를 정말 칭찬하고 싶네요. 그날의 식사를 다시 떠올려봐도 아주 완벽한 마리아주였습니다.
Chardonnay는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아주 대표적인 포도 품종으로, 샴페인에 들어가는 품종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이트 와인의 품종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샤르도네라고 하기도 하고 샤도네이라고 하기도 하죠. 오늘은 미국의 Chardonnay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미국식 발음에 가까운 샤도네이를 택하도록 하겠습니다.
샤도네이는 가장 유명한 품종 중 하나인 만큼 나라와 대륙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생산되고 있는데, 입문자에게는 '이거랑 이게 똑같은 품종이라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역에 따라 아주 다른 향과 맛을 보여줍니다. 비교할 만한 예시로, 굴의 단짝 친구로 아주 잘 알려진 프랑스 와인인 '샤블리'*도 Chardonnay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지만 오늘 이야기할 미국 샤도네이와는 캐릭터가 확연히 다르지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샤도네이(미국)와 샤르도네(프랑스)를 비교해보면서 마시는 것도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비교시음을 하게 된다면 미국 나파 밸리의 샤도네이와 프랑스 부르고뉴의 샤르도네를 비교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으실 수 있거든요.)
*샤블리(Chablis) : 프랑스 부르고뉴의 샤블리 지역에서 생산된 화이트 와인
설명이 길었네요. 그래서 오늘의 와인은 뭐냐 하면 미국 Oregon주에서 생산된 샤도네이 와인으로, 유명 와이너리 중 하나인 도멘 드루엥(Domaine Drouhin)의 Arthur입니다. 분명 미국이라고 했는데, 드루엥이라는 이름에서는 왠지 프랑스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나요? 도멘 드루엥은, 프랑스에서 아주 유명한 와인 생산자인 조셉 드루엥의 3대손과 그 3대손의 딸이 미국의 오레곤으로 건너와 만든 와이너리라고 합니다. 이야기가 좀 복잡했습니다만 아무튼 프랑스의 저명한 와인 생산자의 가족이다, 이 말입니다.
참고로 오레곤은 고급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역과 기후가 비슷해 부르고뉴의 대표 품종(피노 누아, 샤르도네)으로 만든 와인이 유명합니다. 와덕의 종착지라는 부르고뉴와 비슷하다? 궁금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저도 아직 오레곤 피노누아를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어서 와인을 사러 갔다 하면 항상 노리는 품목이기는 한데, 아직 좋은 기회를 찾지 못하던 중이었습니다. 구하기 힘든 것은 아닙니다만 가격대가 좀 있는 편이라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 이마트에서 화이트 와인을 세일한다기에 갔다가 오레곤 샤도네이를 발견하고는 약간 비싸지만 사버린 겁니다. 위에 언급했듯 샤도네이도 부르고뉴 품종이니까요. 정가가 4만 원대였으니, 화이트 와인으로서는 '데일리급'보다는 조금 높은 '주말급' 혹은 '소소한 기념일급' 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클램차우더의 짝꿍으로 도멘드루엥의 Arthur씨를 고른 이유는 아까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단순히 와인과 음식의 Origin, 원산지가 '미국'으로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몹시 단순 무식한 방법 같지만 지역으로 묶는 건 음식과 와인을 페어링 할 때 꽤 유용하답니다.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요행길이라고나 할까요. 혹시 궁금하실까 봐 덧붙이자면 고려 대상이었던 다른 후보군으로는 뉴질랜드의 소비뇽블랑, 스페인의 알바리뇨가 있었죠. 이 둘은 차차 다른 음식과 등장하게 될 겁니다.
제가 미국 샤도네이의 특징을 단순하게 표현해보자면, 향은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맛에서는 달달함보다는 상큼함이 치고 올라옵니다. 그렇다고 쨍한 상큼함은 아니고 적당히 둥글둥글한 산미랄까요. 뭐 아무튼 제 입맛에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미국, 그중에서도 샤도네이가 많이 나오는 캘리포니아 쪽은 유럽보다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고 와인을 숙성할 때 쓰는 오크통의 향도 진한 와인이 많기 때문에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요, 물론 와인마다 차이는 있습니다.
제가 마신 Arthur씨의 경우 캘리포니아보다 더 서늘한 오레곤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의 샤도네이보다 좀 더 깔끔하다고 할까요, 가볍게 맛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앞서 말한 미국 샤도네이의 특징적인 부분도 가지고 있었죠. 참, 짧은 테이스팅 실력으로 뭔가를 표현하려니 어렵기는 하네요.
이런 특징을 가졌기 때문에 부드러운 크림수프인 클램차우더와는 찰떡궁합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클램차우더에 조갯살이 들어가긴 했지만 해산물의 향이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라서, 부르고뉴 샤르도네보다 좀 더 느끼할 수 있는 미국 샤도네이와도 잘 어울리고요. 느끼하다, 라는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느끼+느끼'의 조합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고 보면 무엇인가 두 개를 짝지을 때 우리는 보통 비슷한 두 개를 조합하는 것보다는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는 다른 두 개를 조합하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끼지 않나 싶습니다. 연애할 때도 적당히 성격이 달라야 안싸우고 오래 만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와인과 음식의 마리아주를 생각해보면, 의외로 같은 느낌의 두 개를 결합했을 때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느끼+느끼' 조합 같이 말이죠.
이제 1편인데, 벌써 제 페어링 비법을 두 개나 공개해버리고 말았네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결국 공통점을 가진 와인과 음식을 페어링해라, 라는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본 중의 기본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라서 사실 실제 활용하려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될 거예요. 뭐 이런 걸 비법이라고 했지?라고 생각하실 정도로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클램차우더와 도멘드루엥의 (왠지 아저씨일 것 같은) Arthur씨를 사서 드셔 보세요! 입에서 터지는 폭죽, 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