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토 후카사와의 워크숍, 그리고 IDEO와의 프로젝트 이후. 우리 팀원들과 새로운 153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지금의 153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결론은 단순했다. 153의 원형 그대로를 살리고, CMF를 바꿔 여러 에디션을 만들자는 것. 우리가 가진 디자인의 힘을 지키면서, 더 넓은 이야기를 풀어내자는 것이었다.
먼저 한정판으로 생산되는 에디션은 가능한 한 원래의 디자인에 충실하게 만들자고 했다. 다른 에디션들은 여러 가지 소재와 디테일을 활용해 회사가 가진 헤리티지를 새롭게 이야기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우리의 생각만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표이사를 설득해야 했다.
문제는 153이라는 볼펜에 깊이 배어 있는 선입견이었다. "300원짜리 볼펜." 그 익숙한 꼬리표를 머릿속에서 떼어내지 못한 직원들, 임원들, 그리고 대표이사까지. 이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어떤 논의도 허상에 불과했다. 우리의 디자인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가치가 있는지, 그것을 입증해야 했다.
회의실에서 생각을 가늠하기 위해 영업팀이나 마케터들에게 의견을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이게 팔리겠습니까?” “얼마 짜리를 만들려고 합니까?” “차라리 클립을 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볼펜 디자인과 다른 소재의 조합은 그들에겐 생소했고, 우리의 생각은 비웃음 거리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설계팀 또한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볼펜 자체가 너무 얇아요. 프리미엄 제품으로 만들려면 금속 심을 써야 하는데, 이걸 기존의 노크 느낌을 살리며 구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153 프리미엄이 출시되기 전. 지금은 성공적인 사례로 떠올려지는 그 시간을 지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성을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회사가 필요한 변화였으므로. 그래서 설득을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대학교 선배로 부터 작가 활동을 하시는 선배 두 분을 소개 받았다. 필기구 공예품 작업을 하는 분들이었다. 나는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부탁에 선배들은 기꺼이 응답했다. “이 디자인으로 작업해 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쁩니다.” 이분들도 153 디자인에 오래 매료되어 있었지만, 저작권과 여러 제약으로 손을 대지 못했던 터였다. 서로의 열정이 맞닿는 순간, 작업은 곧 시작되었다.
프로토타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졌다. 금속과 목재. 금속은 고급 필기구에서 자주 사용되는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와 알루미늄으로, 목재는 단단하고 비중이 높은 아프리카 흑목과 리그넘 바이테(Lignum Vitae)로 작업하기로 했다. 알루미늄의 가공은 양산 가능성을 고려해 별도의 생산처를 찾아 맡겼다. 반면, 나머지는 선배님들이 직접 만들어 주셨다.
알루미늄 가공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6각 형태를 얇고 길게 가공하는 기술적 문제는 있었지만, 설비 조율로 해결 가능성이 보였다. 알루미늄을 성공적으로 가공하면, 이후 황동 같은 금속도 가능해질 터였다.
문제는 목재였다. 단단한 재료를 6각으로 가공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회전반으로 돌려 깎는 일반적인 원통형 목재 펜과 달리, 6각 구조는 정밀한 공정을 요구했다. 독일에서 원하는 크기의 6각 칼 틀을 주문해 핸드 가공을 시도했다. 연필 제조에서 사용되는 방식과 유사했지만, 우리가 쓰는 나무들은 너무 단단했다. 기존 기계로는 불가능했다. 결국 손작업과 별도의 공정으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가공 원가는 처음부터 합리적이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었다. 300원짜리 볼펜이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 양산 가능한 금속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우리는 자신감을 얻었다.
선배님들이 스털링 실버와 목재로 만든 153을 가져온 날, 그 순간의 놀라움은 여전히 선명하다. 눈앞에 놓인 볼펜은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특히 스털링 실버 에디션은 판매가 된다면 100만 원을 훌쩍 넘길 수준이었다.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한정판 필기구를 떠올리며, 이 정도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프로토타입을 들고 대표이사를 찾아갔다. 이후의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아는 153의 헤리티지로 이어졌다.
153 프리미엄이 출시되던 날, 네이버 검색어 실시간 순위 1위에 올랐고, 제품은 출시 즉시 품절되었다. 리세일 가격은 20배 가까이 치솟았다. 회사의 새로운 제품군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양한 에디션으로 확장되어 갔다. 153은 이제 회사의 혁신적인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날, 153 프리미엄이 세상에 나오던 날,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