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O와의 협업 2

by 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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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 회사 소개를 받은 뒤, 우리는 소비자 인터뷰 내용과 시장 조사 데이터를 IDEO 디자이너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모든 아이데이션은 각자의 정보가 충분히 공유되고 숙지 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만 오류를 줄이고 이견을 좁힐 수 있다. 그래서 인터뷰 과정이나 그날의 세부 내용을 함께 들여다보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키워드로 떠오르는 말들은 포스트잍에 적어 벽에 붙였고, 아이디어가 될 만한 내용들은 굵은 네임펜으로 커다랗게 써 두었다. 누구라도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인터뷰는 정성 조사 형태로 진행되었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우선 섭외했으며, 제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부터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폭넓은 대상을 인터뷰에 포함했다. 친분이 있어야 마음 깊은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였다. 모든 과정은 녹화해 두고, 추후 다시 보며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각자가 조사한 내용을 키워드로 압축하고, 그 키워드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 함께 공유했다. 같은 단어일지라도 각자가 상상하는 형태가 다를 수 있기에, 이미지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명확히 전달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 작업은 오히려 디자인 초기의 모호함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 생각이 빠르게 모이면서도 합리적으로 정리되었다.


키워드별 이미지를 통해 포스트잍에 간단히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네임펜으로 빠르게 그려 내는 방식이었다. 디테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려 한 번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기 어렵다는 설명이 있었다. 간단한 형상이나 구조를 스케치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 이렇게 아이데이션을 하니 짧은 시간 안에 놀랍도록 많은 아이디어가 쌓였다.


다음으로,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디자이너 10여 명을 모았다. 우리는 우리의 키워드와 이미지를 설명했고, 1시간 남짓 아이데이션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훈련된 사람들답게 짧은 시간 안에 놀랍도록 다양한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도 그때의 브레인스토밍 기록을 돌아보곤 한다. 그 양과 기발함은, 시간이 지나 다시 봐도 놀라운 수준이다.


이렇게 아이디어가 충분히 모인 뒤, 우리는 비로소 디자인을 시작했다. 여러 아이디어를 조합하거나, 특정 아이디어를 심화시키기도 했다. 브레인스토밍 이전에 목표로 하는 타겟 가격과 디자인 스타일을 논의했는데, 결국 스타일은 나오토 후카사와와 디터 람스 수준의 기능적 미니멀리즘으로 좁혀졌다.


우리는 디자인 과정 중 수시로 나오토 후카사와의 디자인 작품집과 디터 람스의 *Less and More*를 펼쳐 보며 참고했다. 동시에, 한 가지 새롭게 깨달은 점은 디자인 중간 과정에 CMF(Color, Material, Finish) 담당 디렉터가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내게는 낯선 일이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는 전문적인 CMF팀이 없었다. 제품 디자이너가 소재를 제안하고, 이를 설계팀이 검토하는 구조였다. 이렇다 보니 늘 사용하던 소재만 쓰는 데 익숙했고, 새로운 접근이 드물었다. 나는 직접 발품을 팔아 소재를 조사하고, 사내 컬러칩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곤 했다. 하지만 CMF 전문가의 존재는 양산 제품의 완성도를 크게 높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첫날 자기소개를 하며 회사를 둘러보던 중, 나는 익숙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대학원 시절 CMF를 공부할 때 봤던 미국 원서였다. 반가운 마음에 “이 책으로 공부했었다”고 말하자, 옆에 있던 CMF 디렉터가 자신의 저서라고 알려주었다. 놀랍고 반가운 순간이었다. 책을 다시 살펴보니 그의 이름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나는 책을 통해 공부한 덕분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 CMF 디렉터는 IDEO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IDEO의 디렉터들은 스탠퍼드 출신이 많았다. 팔로알토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일까. 스탠퍼드와 가까운 위치에 있어 영향을 받은 듯했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기업 CEO들이 스탠퍼드 출신인 것처럼.


우리는 디자인을 진행하며 IDEO의 장비를 이용해 프로토타입을 제작했다. 그 과정에서 CMF 담당자와의 미팅이 이루어졌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소재를 분석하고, 필요한 정보를 조사해 수급처를 찾아주었다. 놀라운 점은, 단순히 고품질의 해외 소재를 제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우선으로 찾아주었다는 것이다. 해당 소재의 회사 정보까지 정리해 전달받았다.

보통 디자이너는 종종 양산보다는 컨셉에 치중하기 쉽다. 그러나 IDEO는 양산까지 고려하는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프로세스는 나에게 큰 배움이었고, 이후 친환경 CMF 전문가로서 성장하고자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나는 내 디자인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느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디자인 과정은 더욱 신속하고 체계적이 되었으며, IDEO의 브레인스토밍 방식을 업무에 도입했다. 새로운 회사로 옮길 때마다 그 방식을 공유하고 교육하며,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었다. 내가 있었던 회사들이 디자인 전문 회사는 아니었기에 IDEO와 같은 환경을 구축하기란 쉽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설득해야 했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평가를 받았을 때, 나는 늘 과분한 말을 들었다.


“당신 때문에 회사가 변했다.”

“회사 역사상 최고의 디자이너였다.”는 찬사를.


그리고 그 말들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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