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와 마포종점
치매 모친이 요양원에 가신 지 3개월이 되었다. 주말마다 모셔와 집에서 식사하거나, 남한산성 등에 바람 쐬러 나가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나는 월요일 밤이면 가요무대를 본다. 흘러간 옛 노래를 좋아하는 나를 예전부터 막역한 친구들은 애늙은이라고 놀린다. 그래도 그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를 들으면 금방 추억에 잠기는 것이 정말 좋다.
가요무대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찔레꽃(가수 백난아)이라 한다. 가사 중에 "작년 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를 들으면 칼라도 아닌, 빛바랜 흑백 사진을 마냥 쳐다보며 웃음 짓는 얼굴이 상상되지 않은가!
수년 전에 모친과 KBS 방송국을 견학하였고, 작년 봄에는 가요무대 방청권을 얻어 가수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봤다. 토요일인 오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유튜브로 가요무대를 보고 있다. 시원한 다방커피를 마시면서...
내가 좋아하는 여가수가 마포종점을 부르고 있다. "밤 깊은 마포 종점 ~"이라는 가사로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은방울 자매가 1968년에 발표한 곡이다.
시대의 흐름에 밀려 퇴각하는 전차와 마포의 모습, 어둡고 쓸쓸한 서울의 밤 풍경을 통해 떠나간 연인에 대한 서글픈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서울노래다.
평범한 제목보다 지명이 들어간 노래가 더 정감이 가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배호가 부른 "안개 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등 지역에 얽힌 곡들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토록 애절할까! 진성이 부른 '안동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그곳에 가보고 싶을 정도다.
유행가에 무슨 심오한 철학이, 삶과 사랑에 대한 대단한 성찰이 담겼을 리는 없다. 그것은 대중적인 주제의 삶과 사랑을 대중적인 방식으로 노래했는데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은 노래에 담긴 세월과 아픈 흔적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 을지로입구에 살았다. 그 당시 을지로에 전차가 다녀 몇 번 탔는데 운전수가 종을 땡땡 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런 전차를 코미디언 구봉서가 주연한 영화 '수학여행'에서 최근에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때 배우 김동원이 운전수 역할을 했는데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어린 학생들이 무척 아쉬워하였다.
나는 가끔 전차에 대한 추억을 느끼려고 서울역사박물관 앞으로 간다. 그곳에 서 있는 전차를 바라보며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 (무심코 그를 따라 타고 본 전차~)이나 '마포종점'을 부르면 1960년대로 순간이동하기 때문이다.
전차하면 생각나는 것이 또 있다. 철로 위에 대못을 올려놓으면 전차가 지나가 납작한 칼이 되는데 그것을 갖고 친구들과 칼싸움을 하거나, 던져 과녁 맞히기 놀이를 한다. 넉넉지 못한 시절에 친구 따라 장난 삼아 별 위험한 짓도 했었다.
마포종점 노랫말에는 "당인리 발전소, 여의도 비행장" 등 그 당시 서울을 보여주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작년 가을까지 10여 년간 모친이 사셨던 마포집을 관리하였다. 그때 강변북로를 달리면 마포 절두산 순교성지 바로 전에 특이한 건물들이 보인다. 일부 공간을 마포새빛 문화숲공원으로 꾸몄는데, 그곳이 한때 유명했던 '당인리 화력발전소'였기 때문에 늘 시선이 간다. 지금은 열병합 발전방식으로 개조되어 남서울 지역의 난방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황량한 모래바람과 땅콩밭, 오가는 비행기의 휴식처에 불과했던 여의도 비행장, 그리고 새우젓과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마포나루는 옛날 얘기가 되었다. 아무튼 마포종점은 요즘 찾아볼 수 없는,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느림보 전차의 종착역이었을 뿐이다.
가난한 연인들이 값싼 차표 한 장에 의존해 종점에 내려 더 가고 싶은 여운을 남기며 쓸쓸히 거닐던 마포가 불과 수십 년 만에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01년 가을 내가 미국 LA 한인축제에 참석해 노래한 적이 있다. 그때 초청가수로 은방울자매가 나왔는데 '마포종점'을 얼마나 잘 부르는지, 마치 금쟁반에 은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나눴을 때, 우리 부모님이 서울 마포에 살고, 마포종점이 애창곡이라고 말씀드리니 웃으며 좋아하셨다.
가요무대에서 '마포종점'을 시청하고 있는 모친을 옆에서 바라보니 흐뭇해 보인다. 무려 30년 가까이 마포에서 사셨으니 그럴만하다.
글쓴이, 나그네 인생 이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