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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호 Feb 15. 2024

동치미와 고구마로 만들어진 세포를 갖고 태어난 아이

[마흔네살 일기장] 산모친구에게 동치미 가져다주기


지역서점에서 일하는 친구 지수가 배가 남산만큼 불러서는, 얼마 전 속이 미식거리고 소화가 안되어 동치미 같은 게 먹고 싶다며 지나가는 말로 내게 무심히 말했다


베보자기로 짜서 만든 수제 동치미


아! 마침 집에 동치미가 있었지. 얼마 전 엄니가 사과, 배, 양파를 갈아 베보자기로 짜내 만든 동치미와 오늘 아침에 간양파를 넣어 맛을 낸 고구마샐러드를 지수의 서점책상 위에 올려뒀다.


이런 동치미의 첫맛은 시큼하고 끝맛은 새콤하다. 그리 달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맛이 난다. 엄니는 잘 만들지도 않을 걸 굳이 다른 사람한테 주냐며 엊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부끄러워 했다.


엄니가 하는 음식들은 양념을 적게 넣고 재료만 가지고 슴슴하게 맛을 내는 고유의 비기 같은 게 있다. 젊어서는 할머니의 호된 꾸지람과, 식탐이 있으나 굶으면 굶었지 절대 맛 없는 건 입에 넣지 않는 아버지 덕분에 이룬 지경이다.


맛있어서 좋았지만 엄니가 고생하는 게 싫은 난 이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늘 대면대면하게 굴었다. 그래도 결국 이 맛에 길들여진 나는 향이나 맛이 억센 바깥 음식들은 잘 안 먹게 되었다. 


나는 단 것도 짠 것도 매운 것도 싫다. 나는 슴슴한 게 좋다. 근데 평양냉명은 또 싫다. 그건 진짜 만들다가 만 맛이 난다. 슴슴하게 맛있다는 게 무슨 맛인지 사람들은 정말 모른다. 으이구 답답해.


북쪽에서 온 이웃들에게 평양냉면을 물어보면 자기들도 그런 음식이 있었는지 잘 모르던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누가 이런 환타지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자료를 찾아보니 평양냉면은 남쪽에서 부르는 말이고, 본토에서는 그냥 '국수'라고 부른다 합니다. 북쪽에서는 국수가 겨울음식이라 합니다. 춥고 가문 지방에서 나고자란 가을무로 동치미를 담궈 살얼음과 면을 넣었으니 응당 맛이 있었겠죠. TMI같아 더 적고 싶진 않았는데


함경도에서 넘어온 이웃의 말로는 북한 고지대에서 자란 감자는 손으로 힘을 주면 '똑'하고 부러질 정도로 퍼석퍼석하다 합니다. 고랭지라 추운날씨에 가물기까지 하니. 점성이 떨어지는 감자가루를 손으로 계속 치대어 반죽을 만드는데, 이 반죽으로 면을 얇게 뽑는 게 아주 고급기술이라 했습니다. 온대지방에서 자라는 밀과 밀가루가 북한에 많지 않을터이니 그 얇은 감자면을 삶으면 우리가 먹는 냉면처럼 투명하고 쫄깃했을 겁니다. 그런 감자면과 살얼음 띄운 동치미 국물을 넣었으니 양념을 진하게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북녘에서 나고자란 재료로 만든 국수를 남한에서 남쪽의 재료로 만들면 분명 그 맛이 나기 쉽지 않을겁니다.)



아무튼 그 짝 음식은 양념이 귀해 슴슴하게 만든 것이고 이쪽은 재료맛을 최대한 살리려고 일부로 안넣어 슴슴하게 만든 거라고. 어딜 비교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미안. 이 글을 SNS에 올렸다가 지인이 추운 북쪽은 더운 남쪽과 달리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아 옛날부터 간(소금)과 양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어 음식을 심심하게 만들어 먹었다고 말해주었다. 심지어 과거 서해안 최대 염전들이 황해-평안도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소금이 부족해서 안 넣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도대체 아는 게 무얼까?) 


아무튼 그래서 난 안주도 안 먹고 보통 술만 마신다. 나에겐 맥주가 술이자 동시에 안주다. 그래 역시 불리한 땐 술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 게 최고다.





한번 더 아무튼! 동치미랑 샐러드를 종이백에 싸가지고 걸어오다가 비에 많이 젖었는지 백이 툭 터져 한손에는 우산을, 한손에는 반찬통을 안고 조심히 한참을 걸어왔다.


누가 보면 엄마가 해준 반찬통을 애지중지 가슴에 품어 나르는 중년남성처럼 보였을 거다.


근데 지수가 맛없다고 하면 어쩌지? 괜히 가져다 주었나 라는 생각이 몽글몽글...그래도 얘는 착하니깐 맛있다고 하겠지 (강요)


지수가 말했다


"잘 먹을게. 얼마 전에는 서점 친구들과 동네분들이 김치와 반찬을 한가득 가져다 줬어. 내 배 속에 있는 애는 태어나면 동네사람들한테 정말 잘해야 할꺼야. 껄껄껄"


"그래. 네 아이는 동치미와 고구마와 김치로 만들어진 세포를 갖고 태어난 아이가 될꺼야"



#임산부 #동치미 #지역서점 #마을공동체 #이웃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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