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서 자유의지는 점차 사라진다.
신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때, 과연 그건 믿을 만했을까? 이제 갓 돌을 넘긴 조카를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 품에 안겨 가고 싶은 곳을 향해 손가락질이나 겨우 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걸음마를 뗀 지금, 이젠 엄마가 잡으려고만 해도 뒤로 넘어가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도움의 손길을 뿌리쳐 버리는 작은 손이 제법 매섭다.
무법자의 등장이다. 나 가는 길을 막지 마라! 눈은 사고 칠 거리를 찾아 두리번두리번, 입술은 집중하기 위해 꾹 다물었다.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으려는 듯, 두 손은 사선으로 번쩍 들었다. 발이 넓게 팔(八)자를 그리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 하지만 속도 조절이란 없다. 그저 앞만 보고 돌진이다. 그야말로 야생 당나귀가 따로 없다.
오늘은 비가 와서 못 나가.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문 앞에 서서 제 신발을 들고 어찌나 소리를 질러대는지 엄마는 이미 탈진 상태다. 보다 못한 내가 컴퓨터로 어린이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곡 8번의 제목은 귀가 긴 등장인물, 11번은 피아니스트다. 참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제목이 아닌가. 심지어 12번은 화석이라니. 그래도 화석은 원래 동물이었어요, 그 옛날엔. 정도로 이해한다지만, 동물이 아닐지도 모를 귀가 긴 등장인물과 동물도 아닌 피아니스트는 왜 거기 들어가 있는 건지.
귀가 긴 등장인물은 당나귀란다. 3번 당나귀가 야생 당나귀라면 이건 일에 지친 집 당나귀라고 작곡가는 설명했다. 그래서 두 개의 피아노가 경주하듯 빠르게 오르내리는 3번과 달리 8번은 느릿하게 쳐지듯 가라앉았다. 둘 사이엔 자유의지가 있다.
어른이 되면서 자유의지는 점차 사라진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슬프게도 자유의지가 행동으로 옮겨질 수 없는 선 정도는 알고 산다는 의미다. 어깨 위에 얹어진 짐의 무게가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고, 더불어 살기 위해 스스로 몸에 줄을 묶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결정장애에 시달리기도 한다. 내 의지가 아닌, 내 목줄을 잡고 있는 누군가에게 결정권을 모두 넘겨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집 당나귀처럼. 그렇기에 길들지 않은 야생성은 마치 자유의지의 유사어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주인 손에 끌려가는 집 당나귀의 자유의지, 그 야생성은 과연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는 영영 자유의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행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옆에서 피아니스트가 말했다. 치기 싫은 피아노를 억지로 치고 있는 나 역시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연습곡을 엉망진창으로 치고 있는 그는 피아노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이미 박탈당하고, 심지어 인간 고유의 야생성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나 이제 다 컸어요. 내 의지대로 살 거예요. 직진 본능을 뽐내며 식탁을 향해 달려가던 녀석이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제야 절제 없는 자유의지의 결과를 보라는 듯, 신께서 웃으셨다. 그리고 녀석은 분한지 온 힘을 다해 울었다.
하지만 한바탕 울고 일어선 녀석이 두 다리는 팔자로, 두 팔은 하늘 위로 뻗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인간의 자유의지, 그 야생성을 반드시 보여주고 말겠다는 강한 집념을 담아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주먹은 꼭 쥐었다. 그리고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제 인생에서 아직 겪어보지 못한 가장 빠른 속도로 두 다리를 움직였다.
비가 그쳤다. 그래, 나가자! 내가 졌다. 엄마의 항복이다. 우리 집에 사는 귀가 긴 등장인물은 등에 꽃무늬 가방을 메고 출격 준비를 한다. 그 안엔 제 기저귀와 물티슈가 들어있다. 나름 짐이라면 짐이다. 그리고 난 모두 떠난 빈 거실에서 습관처럼 피아노를 친다. 계속 하품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