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렇다면 좀 힘들겠는데요.
철제 계단이 탬버린 소리를 내며 반겼다. 무거운 가방을 두 손으로 끌어당겨 몸에 붙였다. 좁은 계단 몇 개를 내려가기 위해 잠시 호흡을 참았다. 그나마 저녁 도착 비행기여서 섬의 열기가 한풀 꺾인 듯했다. 내리는 비행기에서 출구가 다 보일 정도로 아주 작은 코나 공항은 호놀룰루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레이를 파는 사람도, 기념사진을 찍어 팔려는 사진사도 없었다.
가로로 기다랗게 줄 서 있는 하와이 군도에서 가장 큰 섬, 하와이섬은 ‘현직’ 화산이다. 아직도 허리 밑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은 젊은 혈기를 품고 있다. 신생 현무암들은 반짝반짝하다. 몽글몽글하게 끓어오르다 흘러넘쳐 버린 설탕 시럽 같다. 아직 풀씨가 자리 잡지 못한 검은 땅과 코발트블루의 하늘은 절반씩 화면을 차지한다.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그런 색의 배합은 언제나 세련된 느낌을 주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이 섬에 있단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산은 네팔과 티베트 국경에 있지 않던가. 동행이 말했다. 해저에서부터 잰 높이가요. 에베레스트산 등정은 평생 하지 못할 내게 이만한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 용기를 냈다. 마우나케아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옛적 강원도 대관령을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빙글빙글 돌고 돌아 천국으로 향하는 길. 구름이 점점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이런 산을 자동차로 쉽게 오를 수 있다니 그게 더 놀랍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전,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방문자 센터. 지대가 높아 고산병 증세가 나타날 수 있기에 반드시 이곳에서 30분을 쉬어가야 한단다. 몸을 적응시키는 시간이다. 만약 숨쉬기 힘들거나 현기증, 구토 증세를 보이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후텁지근한 열대성 공기와는 느낌부터 다른 산 위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사람들이 저마다 긴팔, 긴바지로 갈아입었다.
30분 기다리셨나요? 네. 자동차는 사륜구동입니까? 네. 기름은 충분한가요? 올라갔다 내려올 정도는 됩니다만. 아, 그렇다면 좀 힘들겠는데요. 산 정상에선 기압이 높아 연소하는 데에 더 많은 기름이 필요하거든요.
안내원의 말에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졸아든 설탕 시럽처럼 새까만 현무암으로 변했다. 우린 서로 인제 어쩌지? 하는 표정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안내원이 미안하단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이죠? 곧 해가 질 테니 저 위에서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산 정상에 올라갈 순 없지만, 그것이 최선일 것 같네요.
안내원이 가리킨 작은 언덕엔 순례길을 걷듯 천천히 열 맞춰 상향하는 군상이 보였다. 차 바퀴가 심하게 굴곡진 바닥 위를 구르느라 멀미라도 할 것 같아서 언덕 아래 넓은 공터에 차를 세웠다. 달뜬 우리의 기분을 대변하듯 주변으로 흙먼지가 휘 하고 공기 중에 떠오르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산 높이가 있으니 고만한 언덕일지라도 숨이 차 빠르게 뛰어오를 순 없다. 천천히 사람들의 꼬리를 잡고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라 지체할 수 없단 생각에 그 마음만으로도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성실한 발걸음들이 모여 금세 언덕 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맞이한 기묘한 풍광. 신이 그리신 작품 중 이 정도면 추상화나 상상화가 아닐까 싶은 정도로 현실감 없는 장면. 캐나다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느꼈던 자연의 장대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발밑으로 깔린 하얀 구름은 지는 해의 강렬한 색을 찍어 발라 몸 전체를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그냥 붉은빛이란 표현조차 완벽하거나 적당하지 않았다. 빨강이란 색의 모든 것, 그 다채로운 색을 몽환적인 그림 한 장에 다 담았다. 서둘러 카메라 셔터를 눌러 봤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람의 눈보다 못한 카메라 렌즈는 그걸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니 시간과 공을 들여서 내 눈과 머릿속에 차곡차곡 잘 저장해야 한다. 언제든 다시 꺼내어 볼 수 있게.
이제 붉은색은 점차 검은색으로 바뀌어 간다. 그건 이 땅의 생성 과정과 닮았다. 심연에서부터 끓어오른 붉고 뜨거운 액체. 무엇이 그렇게 견딜 수 없어 땅을 뚫고 솟아올랐을까. 결국 지면을 타고 흐르며 열기는 식고 몸뚱이마저 검게 굳어 버린다는 걸 알고 있을까. 씩씩거리던 숨조차 빠져나가며 구멍 숭숭 뚫려버린 땅바닥이 섬의 사방을 덮고 있다.
화산 폭발하듯 갑자기 화가 나면 어떻게 하세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서 글쎄요, 하며 시간을 끌다가 신중하게 입을 뗀다. 저도 그 답을 얻기 위해 참 고민이 많았답니다. 명상도 해 봤고, 관련 서적도 읽어 봤고, 공간 벗어나기나 호흡하기, 속으로 숫자세기 같은 실질적인 방법도 써 봤죠. 그렇게 애쓰다 보니 조금씩 제 모난 부분이 둥그렇게 오려져 있더군요. 아주 작게 잘라낸 각들이 점점 곡선을 만든 것이죠.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방법은 나이를 먹는 것이었어요.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더라고요. 나이가 들면 기력이 없어 화낼 일도 줄어들고, 때론 연륜이 예방주사가 되어 화에 둔감해지기도 하거든요.
산을 다 내려와 드넓게 펼쳐진 검은 땅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행이 이런 땅은 용암이 굳은지 얼마 안 된 젊은 땅이라 풀씨도 자라지 않는다고 설명해 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 모난 성격의 땅도 색이 옅어지고 풀과 꽃을 자라게 할 거라고 덧붙였다. 나이를 먹어가는 내 안에서도 분노의 색이 점차 옅어지고 푸른 풀과 예쁜 꽃이 피어날 날이 있겠지, 하는 생각에 애틋한 마음을 담아 거친 땅을 손으로 쓰다듬어 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땅의 색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하늘은 온통 검은 물감을 뒤집어썼다. 가로등 몇 개 없는 외길을 자동차 몇 대가 거침없이 달렸다. 이 땅은 젊은 혈기에 또다시 붉게 폭발했다가 차갑게 식으며 검어질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이 역동적인 섬은 우리에게 마음 속 천국의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