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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Jun 11. 2024

암흑의 지문(指紋)-2

그런데 그 소리는 ‘후룹’보다는 ‘투룹’에 가까웠다.

 # 듣다.


    남자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내 속도를 맞춰 주느라 천천히 걷기는 했지만 당당함마저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그의 걸음엔 내가 갖고 싶어하는 페르마타가 있었다. 그는 방향을 틀 때마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호흡을 조절하듯 잠깐씩 그것을 사용하곤 했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주변은 온통 암흑이었다. 그래서 그가 만약 그 부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내 몸은 방향 바꿀 시간조차 얻지 못하고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면적이 넓게 바닥에 닿는 그의 구두 소리와 면적이 좁게 바닥에 닿는 내 구두 소리가 점차 비슷하게 맞춰졌다. 두 구두 소리는 군인들이 열을 맞춰 걷는 것처럼 균일한 간격으로 바닥에 닿았다. 카펫을 깐 바닥은 계속 구두 소리를 먹어 퍽퍽한 소리를 냈다. 몇 분의 짧은 시간 동안 오롯이 발소리에만 집중해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남자의 걸음이 서서히 멈춰 섰다.

    “오른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시면 됩니다.”

    남자의 말에 손을 뻗어 공중을 휘저었다. 의자의 상단부가 손에 닿았다. 내가 의자와 식탁과의 간격을 더듬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휴, 이렇게 힘들어서 어디 밥 한 끼 먹겠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낯선 목소리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앉은 곳에서 앞쪽?  아니, 앞쪽에서 조금 왼쪽?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소리가 들리는 거리는 고작 한두 사람 사이에 불과했다. 

    “누, 누구세요?”

    내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A입니다. 오늘 인터뷰하기로 한.”

    그의 목소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좀 높았다. 난 평소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나 분위기로 적당한 목소리를 상상하곤 했었는데 그건 합창의 성부로 비교하면 베이스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제 그의 목소리는 테너 중에서도 카운터테너 쪽이었다. 

    “안녕하세요? 얼굴을 보고 인사해야 하는데 보이질 않으니 이거 뭐… 그래도 어쨌든 전 고개 숙여 인사했어요.”

    “네. 압니다.”

    “네?”

    “아, 전 그저 그쪽이 예의를 중시하는 분 같으니 당연히 누가 보지 않아도 고개 숙여 인사하셨을 거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네…”

    그때 내가 들어온 방향에서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웨이터가 돌아온 것 같았다. 

    “물과 와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또다시 웨이터의 페르마타를 사용하는 듯한 걸음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 유리잔 네 개를 두 개씩 나눠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모두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웨이터의 손은 테이블을 더듬지 않고도 그것들이 놓여야 할 정확한 위치를 알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정확하게 물과 와인을 똑같은 양으로 따랐다. 난 그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똑같은 양의 액체가 흐르는 소리, 똑같은 속도와 길이로 흘러 떨어지다가 멈추는 소리.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귀가 뜨인다는 말이 이런 걸까.  귀가 몇 배는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웨이터의 발소리가 다시 멀어져 갔다. 내 손은 테이블 위를 꿈틀거리며 기어야만 했다. 유리잔의 방향을 찾으려 열 손가락을 다 뻗었다. 테이블보, 네모진 테이블, 나이프와 포크를 싼 냅킨, 그리고 유리잔.

    “아, 여기 있었……”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유리잔이 그만 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차가운 액체가 내 손 위로 쏟아졌다. 알코올 향이 주변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테이블을 덮은 천이 축축해지고 일부는 내 치마로도 흘러내렸다. 

    “와인을 쏟으셨군요.”

   그가 소리를 들었는지 건조하게 말했다.  

    “네. 죄송해요. 혹시 그쪽으로도 튀었나요? 옷 젖으셨어요?”

    “아닙니다. 테이블보만 좀 젖은 것 같네요. 기자님은 옷도 젖은 것 같은데…”

    “네. 조금요. 그런데 잘 보이질 않아서 얼마나 얼룩이 졌는지 알 수가 없어요. 산 지 얼마 안 된 옷인데.”

    “그거라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은 그래서 레드 와인은 안 쓰거든요.”

    그가 잔을 들어 와인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는 ‘후룹’보다는 ‘투룹’에 가까웠다. 그건 뭔가 혀가 말리는 듯한 소리였다. 실수일까. 나도 실수했으니 일단 비긴 걸로 해 두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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