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퇴근길은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잖아요. 차도 행인도 없는 퇴근길이면 더 그렇죠. 저는 종로 5가에서 근무하는데, 가끔 이렇게 늦은 시간 일을 마치면 몽롱한 기분을 떨쳐내려고 광화문까지 걸어갑니다. 거기서 심야버스나 택시를 타려고요. 그런데 이 날은 어쩐지 정신이 멀쩡했습니다.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을 넘겨서 그랬던 것 같아요.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을지로에 접어들어 무심코 남산을 올려다봤는데, 글쎄, 타워가 두 개로 보이는 겁니다…. 장마는 지나갔지만 밤안개가 조금 어려 있었고 저는 그 흐릿한 탑의 실루엣을 향해 계속 걸었습니다. 가까이 가기 전까지는 광고용 풍선이나 놀이 기구인가 했죠. 청계천에선 가끔 그런 행사들을 하니까요.
하지만 삼일대로와 을지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 이르자 웬 커다란 사각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백 미터가 족히 넘는 그 탑은 달 시계라도 되는 것처럼 거리에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어요. 밑에 달린 문 주변에는 바다 냄새를 풍기는 미역 줄기들이 뒹굴고 있었고, 회색 게 한 마리가 집게발로 시멘트 도로를 톡톡 건드리고 있더군요. 꼭 우리가 물에 발을 담그기 전에 그러는 것처럼요. 저는 핸드폰을 켜서 탑 주변을 돌며 영상을 찍었습니다. 몇 걸음 물러나니 탑의 꼭대기까지 앵글에 들어왔고 저는 그제야 이 건축물이 등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굉장한 광경이었지만 몹시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래도 동아면세점 건물까지 걸어가는 동안 탑의 정체에 대해 끝 없이 생각하게 되더군요. 속으로는 일단 축제를 위한 가건물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미역 줄기와 회색 게는 리얼리즘을 지나치게 추구한 미술팀의 작품일 거라고 말이죠.
어찌 되었건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여서 SNS에 태그를 이것저것 달아 영상을 올렸는데, 다음날 기자님에게 연락이 온 겁니다! 반차를 내고 늦잠을 자는데 알림이 자꾸 울리는 통에 귀찮아서 혼이 났습니다. 하지만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죠. 기자님 말대로 저는 곧장 라디오 교통방송 채널과 뉴스를 틀었습니다. 한반도 도심에 등대들이 나타났다는 기상천외한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등대들’이라는 복수형의 표현이다. 승훈이 등대를 발견한 2020년 8월 11일 한반도에는 출처 모를 등대들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동해, 서해, 남해의 해양수산청을 포함한 담당 부처들로부터 한국의 등대들은 모두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렇다면 이 등대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미처 이 질문의 답을 찾기도 전에 개당 15톤에 달하는 낯선 등부표들도 연이어 등장했다. 생명과학부 학부생인 여정은 무역선 하부를 통해 국내에 유입된 왜래 어종들의 생태 교란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모처럼 강릉의 고향집에서 머리를 식히다가 평소 사이가 나쁜 자신의 고양이 세 마리가 나란히 붙어서 창가에 앉아있는 장면을 보고는 호기심이 동하여 다가갔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니 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한 채 기울어져 있는 거대한 등부표가 보였다. 119? 112? 아니면 120? 집 앞에서 거대한 등부표를 발견한 사람은 대체 어디에다 신고를 해야 하나…. 수화기를 든 채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의 눈길이 부표 아래에 붙어있는 따개비에 머물렀다. 그것들은 우리나라 고유종도 아니었고 종종 발견되는 외래종인 흰따개비나 화산따개비도 아니었다.
“여정아, 너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창고에 박혀 있던 낫을 가져다가 따개비 샘플을 채취하고 있는, 남의 집 앞마당에 부표를 투척한 범인을 잡을 생각보다 논문 자료의 등장에 흥분한 자신을 보며 여정은 신세를 한탄하듯 말했다. 한편으로는 이 부표의 등장이 어떤 지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몰려오는 회의감과 피로로 인해 슬럼프를 겪고 있던 그녀에게 운명이 인심을 베풀어 주기로 결심한 건지도 몰랐다! 여정은 이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119, 112 그리고 120도 아닌 지도교수의 번호를 눌러 새로 발견한 샘플에 대해 알렸다. 그녀의 빠른 회복이 다행스럽고 반가웠던 지도교수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그 따개비의 품종을 금방 확인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원의 부표를 치우는 일에도 일조했다. 뉴스에서 막 정부가 개설한 신고 채널을 공표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등대 또는 등부표를 발견한 분은 다음 번호로 신고 바랍니다….’
발 빠른 모 신문사의 취재팀은 여정의 마당에서 발견된 등부표, 승훈이 목격한 등대를 포함한 모든 제보와 온라인 상에 떠도는 사진들을 수집하여 전국 지도에 대략적인 분포도를 표시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무분별하게 나타난 줄로 알았던 등대와 등부표들이 차령산맥 줄기를 기준으로 나란히 열 맞추어 서 있던 것이다!
산맥 위쪽의 일곱 등대는 인천, 서울, 남양, 가평, 춘천, 인제, 속초에, 산맥 아래쪽의 여덟 등대는 광주, 순창, 남원, 함양, 합천, 고령, 대구, 영천에 불쑥 솟아나 있었고 등부표들은 각 등대로부터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지도를 본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나스카 문명의 거대한 벌새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처럼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같은 방향으로 특집기사를 준비해오던 경쟁 신문사의 보도팀장 미예는 자기 팀이 밤낮으로 준비한 지도와 유사한 지도가 간발의 차이로 공개되자 짜증이 치솟았다. 경도와 위도가 조금씩 다른 지점들이 있었지만, 퍼다 나른 것 같은 지도를 지면에 올리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회의를 소집해 기사의 방향을 어떻게 바꿀지 의논했다.
“저쪽이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 그쳤다면,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걸 조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등대들이 어디에서, 왜 왔는가?’ 모두가 궁금해하는 건 그거잖아요.”
등대의 위치 분석에 누구보다 애를 썼던 신입이 대담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고생을 보상하는 의미에서나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이 언론사의 의무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서둘러 주제를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이견 없이 등대의 출처에 초점을 맞추어 취재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은 이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비교 역사학의 일인자이자 국제등대협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한 신동식 교수가 가장 먼저 거론되었다. 장수 드라마의 중년 남주처럼 푸근한 인상을 지닌 신 교수는 한국의 등대들을 찾아가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하여 ‘등대 아저씨’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야말로 국내 유일의 인기 등대 전문가였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유럽 여행을 즐기고 있었는데, 등대 마니아답게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등대인 란테르나 등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무려 900년의 역사와 위용을 자랑하는 이 건축물은 젊은 시절의 그가 등대에 매료되도록 만든 인류의 걸작이기도 했다. 신 교수가 항구에 막 도착했을 때 관광객과 주민 할 것 없이 모두가 흥분한 상태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께 쑤체데(무슨 일입니까)?”
그가 짧은 이태리어로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질문을 던진 사람이 외국인임을 확인한 제노바의 중년 부부는 긴말을 생략한 채 특유의 격렬한 손짓으로 항구를 가리켰다. 수년만에 다시 찾은 제노바 항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회갈색과 연한 노란색, 바랜 분홍색이 섞인 낯익은 부둣가 위에 못 보던 언덕이 솟아올라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등탑을 잃어버린 등대의 기단이었다….
신 교수가 국제전화를 받은 것은 그때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하며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황당무계한 사건에 대해 들려주었다. 이어서 급하게 연락한 경위를 설명하고 등대 사진들을 보낼 테니 어디서 온 것인지, 무슨 등대인지를 확인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 가능하실까요?”
“씨, 씨(네, 네).”
“음. 가능하시다는 말씀이시죠? 그럼 바로 메신저로 몇 장 보내드리겠습니다.”
신 교수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자신이 얼이 빠진 나머지 여태 이태리어로 대답했음을 알았다. 이어서 도착한 사진들을 본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사진 속에는 시계의 초침처럼 가늘게 그러나 석양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남산 타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제노바의 란테르나 등대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일등 전문가 섭외에 성공한 언론사는 회심의 한 방을 위하여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집한 정보를 갈무리했다. 사진의 질이 떨어지거나 아무런 특색 없이 평범하여 신 교수가 알아보기 힘든 등대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취재팀의 몫이었다. 그들은 등대가 없어졌다는 해외 기사를 뒤지거나 구글의 이미지 검색 기능을 십분 활용했다. 그렇게 해서 위치 정보만 담은 지도보다 훨씬 심층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지도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한반도를 찾아온 등대들의 소속이 얼마나 다양하며 산발적인지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다섯 등대의 정보를 옮겨보았다.
a.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등대
b. 이탈리아 란테르나 등대 (우리가 알고 있는 등대다)
c. 말레이시아 랑카위 등대
d. 그리스 안드로스 등대
e. 폴란드 코워브제크 등대
이 보도자료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 등대의 소유국들에 닿았다. 관할 하의 등대를 분실한 나라들은 총리, 통령, 안보국장, 해양수산청장, 등대 협회장을 앞장세워 한국 정부에 유감을 표했다. 졸지에 한국은 등대 도둑으로 몰리고 있었다. 한국 정부도 중계방송을 편성하여 우리가 무슨 수로 하루 만에 등대를 옮겨올 수 있었겠느냐는 공식 발표로 응수했다. 그러나 방송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차례 이변이 일어났고, 등대 도둑이라는 억울한 오명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유감을 표한 국가들은 발언을 회수해야 하는 멋쩍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 이변이란 등대들이 다세 제 고향으로 돌아간 사건을 말한다.
등대를 되찾은 나라들은 그들이 또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형 선박에 고정하는 수 톤급의 사슬을 두르거나 거대 나사를 박거나 사방에 보초를 배치하는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비했다. 그러나 반나절만 지나면 등대들은 마치 신데렐라도 된 것처럼 아시아의 작은 반도 국가로 달아나버렸다! 좋다고 찾아오는 등대들을 막을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한국은 시민들의 등대 입장을 엄금하고 이웃 나라의 자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변에 경계선을 두름으로써 자신들이 결코 초대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일련의 사건 덕분에 우리가 아침마다 듣는 교통 방송도 조금 우스워졌다. 제2 경인고속도로 인천대교 방면에 등대가 등장하여 극심한 교통체증이 예상되오니 우회하시길 바랍니다, 하는 식이었다.
웃어넘겨야 할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흥분이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흥미로운 가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으며, 각국의 특파원들은 한국을 찾아와 이제는 등대 주변을 무덤덤하게 지나다니는 행인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뱃사람들이 돌아올 모양입니다. 죽은 뱃사람들이요. 등대는 원래 목적이 뱃길을 안내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도시 한복판에 있으니까….’
‘마법부의 관리가 허술했던 거 아닐까요? 머글들 세상에서 이런 짓을 한 마법사가 누군지 몰라도 조만간 그들에게 혼쭐이 날 겁니다.’
‘트로이 목마 전법이죠. 등대 내부에서 아무런 신호도 없다지만 조만간 쏟아져 나올 겁니다.’
'뭐가 쏟아져 나온다는 거죠?'
특파원이 물었다.
‘외계인이 지구의 첫 번째 정착지로 한반도를 고른 거라고요. 모르시겠어요? 캄캄한 우주에 오래 살다 보니 눈들이 침침해져 최대한 많은 등대를 한국에 모아 놓은 거죠.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등대가 절대 불을 켜지 못하게 해야 할 겁니다.’
수동 통제도 원격 제어의 영역도 벗어난 등대들은 한반도에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불이 꺼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동력 없이도 등대의 불이 들어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두꺼운 천을 미리 덮어 씌워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뜻밖에도 많은 네티즌들이 그의 가설에 지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