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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 Jun 24. 2021

등대의 발작 4

강렬한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호산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위가 고요했다. 그는 바닥에 깔린 유리 파편 뒤로 활짝 열려있는 발코니를 응시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광도 측정은 해가 완벽하게 진 후에야 가능했기 때문에 측정 한 시간 전에 등대에 올라야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지금 시각은 7시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난간에서 올려다본 태양은 중천에 떠있었다. 폭풍을 암시하던 희뿌연 구름은 간데없고 은근한 안개에 덮인 푸른 하늘이 청명한 공기를 나르고 있었다. 이번에 호산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다와 섬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격자무늬 평원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호산은 자신이 죽었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 보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별다른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난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보아도 죽을 만큼 부주의한 행동을 한 기억이 없었다. 등명기가 과열되어 폭발했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그랬다면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화상을 입었어야 하는데, 그가 감지한 것은 오로지 강한 빛뿐이었고 화상 자국도 없었다. 끝으로 그는 이것이 꿈인가를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기면증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는 성격 때문에 신경이 쇠약해진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연 바닥이 흔들리며 등대가 공중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잠시 동안 부유했던 등대는 몇 분만에 도로 내려앉았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난간을 잡았던 그의 팔이 떨리고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곧 맞은편에서 ‘우르르’하는 천둥소리 같은 것이 울려왔다. 그 소리는 하나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말을 들었다 놓는 법이 어디 있나?”

 

 

그러자 이번에는 뒤편에서 ‘끙’하고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산은 발코니 뒤쪽으로 돌아가 앓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높다란 산 꼭대기에서 폭포수 같은 수염이 아래로 떨어지며 찰랑거렸다. 큼지막한 손이 새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손동작에는 조바심과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그가 산이라고 착각한 것은 알고 보니 거인의 몸체였다. 호산은 마른침을 삼키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요, 어르신! 여기는 대체 어딥니까?”



흰 수염 노인이 돋보기를 들어 호산을 굽어보더니 반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는 호령의 12대손 호산 아닌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호산은 자기 위로 그런 이름을 가진 조상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과 저 거대한 체구, 그리고 예스러운 말투로 반추해 볼 때 만물을 꿰뚫는 신쯤 되는 존재일 거라 확신하고 이렇게 되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여긴 어디죠? 제가 죽은 건가요?”



“무슨 한심한 소릴! 자네 인생은 아직 한참 남았어. 우리는 다만 장기가 지겨워져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 시도해보는 중이었다네.”



그때 맞은편 노인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듯 성을 내며 말했다. 염분이 섞인 뜨겁고도 습한 입김이 선미도 등대를 강타했다.



“자네 말을 두다 말고 누구와 얘기를 하는 겐가?”



흰 수염 노인은 호산에게 귀엣말을 하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이 어찌나 큰지 그림자가 등대 전체를 덮을 정도였다.



“저 영감은 귀가 안 좋아.”



“지금 내 욕을 했나?”



“아무 말도 안 했네!”



“흥! 그럼 이제 내가 두겠네.”



반대편 구름 밑으로 거대한 손이 하나 나타났다. 마디가 굵고 붉은 혈색이 도는 그 손가락은 가까운 등대를 들어다가 두 칸 앞으로 움직였다. 뿜어져 나오는 더운 열기 탓인지 그 거인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연상케 했다. 그가 앞으로 나왔다가 다시 뒤로 몸을 기울이자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던 형상이 구름에 완전히 가려졌다.



“두 분의 얼굴이 잘 안 보이네요….”



“구름은 우리 얼굴을 가려주기 위해 존재하지. 미물들이 우리의 얼굴을 본다면 살아있을 수 없을 게야. 그러니 자네도 항상 구름에게 감사하게.”



바다에서 길 잃은 어부들이나 야간비행을 하는 조종사들이 공감하기는 어려운 말이군요, 하고 호산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번 격자무늬의 평원과 경계선에 걸치지 않고 띄엄띄엄 서 있는 등대들에 시선을 던지고는 물었다.



“체스를 두고 계셨나 보죠?”



“오! 자네 체스를 좀 아는가?”



“네, 조금….”



“그럼 나를 좀 도와주게. 이 판에서 꼭 이겨야 하는데 영 밀리고 있어. 보통 수치스러운 게 아니야. 이건 무척 중요한 게 걸린 게임이라네!”

 

 

여기서 이기도록 도와달라고? 호산은 반에서 가장 머리 좋은 친구와 체스를 두었던 중학 시절의 어느 날을 회상했다. 영호. 그게 그 친구의 이름이었다. 그가 들고 온 포켓 체스판은 한바탕 대유행하여 며칠 사이 모두가 하나씩 가방에 챙겨 다니는 필수품이 되었다. 오직 호산만이 그 유행의 물살에 무관심했다. 영호는 학급의 모든 녀석들과 대결을 해서 이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산이 남았다.


옆구리에 체스판을 낀 영호가 호산의 책상으로 다가와 대결을 신청했다. 호산은 규칙을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영호는 체스 규칙은 전혀 어렵지 않으니 금방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는 여유로운 자세로 자신을 또 한 번 승리자로 만들어 줄 희생자에게 체스의 기물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이후에 오는 쉬는 시간에 대국은 벌어졌다. 학우 전원이 체스판을 에워쌌다. 그들은 흥분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결과는 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치열한 대국이 아닌 단순한 위안이었을지 모른다. ‘호산이도 결국 우리와 똑같다’는 것. 그러나 체스가 유행한 이후 최초로 판세가 뒤바뀌었다! 초심자인 호산은 체스판 위에서 새처럼 자유로웠고, 반면 패턴에 묶여 있던 영호는 거듭 자신의 병정들을 잃어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킹을 눕히고 말았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체스의 유행은 한 학기 만에 끝이 났다. 맙소사. 그건 거의 20년 전의 일이었다!


이어서 호산은 눈 앞에 펼쳐진 기묘한 체스판을 살폈다. 그는 아무렇게나 놓인 것처럼 보이는 등대들이 실은 주요 기물이며 등부표들은 졸에 해당하는 ‘폰’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그리고 선미도 등대가 ‘룩’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또한 덩치 큰 두 노인 역시 그와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새로운 게임이 마뜩잖았던 노인들이 폰의 활용법을 시시하게 여긴 나머지 등부표란 등부표들을 죄다 판 밖으로 밀쳐 놓았던 것이다. 호산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대신 게임에서 이기면 저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아 주세요!”



“그러지!”



흰 수염의 거인이 아군을 얻은 기쁨에 몸을 흔들자 차갑고 청량한 바람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훅 끼쳐왔다.



“자자, 해가 백 번 지기 전에 두라니까!”



성질이 급한 상대편이 재촉했다. 호산은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헤아려 보았다. 해가 백 번 진다고? 그는 조금 전부터 거슬리던 지평선의 떨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해가 너무나 빠르게 떴다가 가라앉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차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컴퓨터 스크린이 사람이 감지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깜빡여서 항상 켜져 있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 듯했다. 그 말인즉슨 신이 손을 한번 까딱할 동안 한 번의 계절이 지나가 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호산은 이 판국이 끝나기 전에 자신이 호호 할아버지가 되거나 말라비틀어져 죽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머리털이나 손톱이 제 길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의 시간은 호산의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했다. 태양의 순환이 동일하다는 전제 하에 호산은 대장장이 신이 있는 곳이 남쪽이며 흰 수염 신이 있는 곳은 북쪽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낯선 환경이 주는 혼돈과 어지러움을 참고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등대들의 위치를 관찰했다. 동요 없이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것은 호산의 전문이었다. 다만 등대들이 체스 기물처럼 말이나 왕관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아서 형국을 파악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는 흰 수염 신에게 상대편의 말들이 처음에 어떻게 움직였는지 물었다. 신은 기억을 더듬어 차근차근 칸을 짚어 주었고, 그 움직임을 토대로 호산은 남은 다섯 개의 등대가 각각 어떤 말에 해당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전략을 효율적을 짜기 위해서 등명기에 붙은 증서를 뜯어내 뒷면에다 그림을 그렸다.



일단 판세를 파악한 호산은 상대편의 성향도 고려했다. 성미가 급한 것으로 보아 여러 수를 내다보지 않고 말을 놓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호산은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첫 수를 제안했다.



“제가 타고 있는 등대가 백룩이죠? 이걸 다섯 칸 앞으로 움직이세요.”



오호라. 여섯 칸 앞으로? 하면서 흰 수염을 늘어트린 신이 선미도 등대를 들어 올렸다. 호산은 갑작스러운 진동에 놀라며 난간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목청껏 외쳤다.



“아니요! 다섯 칸, 다섯 칸 앞이요!”



“젊은 양반, 처음부터 그리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지나칠 뻔한 다섯 번째 칸에 등대를 내려놓으며 노인이 나무라듯 말했다. 호산은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다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목이 완전히 쉬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양 편의 말이 다섯 개만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게임을 해치워야 했다. 대장장이를 떠오르게 하는 신은 혀를 끌끌 차더니 a1 자리에 있던 흑룩을 움직여 백나이트를 먹어버렸다. 그러자 흰 수염 신은 질겁하며 호산을 노려보았다. 호산은 그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다음 수를 외쳤다.



 “비숍을 왼쪽 대각선으로 네 칸 움직이세요.”



그 자리는 다름 아닌 흑퀸이 있는 곳이었다! 흰 수염 신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고, 대장장이 신은 여왕을 잃었다. 공격에만 급급하고 방어에는 허술한 적수의 패턴을 호산이 제대로 간파했던 것이다. 노기로 인해 한층 달구어진 바람이 빗방울과 함께 세차게 불어왔다. 이제 양쪽에는 각각 네 개의 말이 남아있었다.


여기서 대장장이 신이 흑룩을 움직여 백비숍을 잡는다면 흰 수염 노인은 게임에서 패배하여 내기에 걸었다는 중요한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흑이 나이트를 움직여 조금 전 과감하게 움직인 백비숍을 잡으려 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호산은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양심이나 정의감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긴장감을 다스리는 방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내면에서 생경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만약 대장장이 신이 지금까지 흰 수염 신을 봐준 것이며, 호산이 계산하지 못한 수를 떠올려 이겨버린다면? 호산은 자신이 이 기묘한 세계에 영영 갇히게 되었을 때 과연 이성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해보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흰 수염 노인을 향해 물었다.



“영감님…. 혹시 여기서 지면 어떻게 됩니까? 중요한 것을 걸었다고 하셨는데, 지금이라도 무르세요. 내기 도박은 좋지 않아요.”
 
 


호산이 용기 없는 소리를 하자 거구의 노인은 어르듯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이겨야만 하네. 자네가 올라 있는 등대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나는가?”



“배들이 길을 잃거나 심한 경우 난파되겠지요.”



“그런 일이 벌어질 걸세.”



“등대가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글쎄, 그보다는….”



노인이 망설이며 말했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걸세.”



호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시간 개념이 남다른 이곳에서라면 존재하던 것이 없던 것이 되고, 없던 것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탄생하는 일이 가능할 것 같았다.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고 자책하며 호산은 다시 한번 호흡을 골랐다. 그러는 사이에 대장장이 신이 흑나이트를 움직여 백비숍을 잡았다! 공격을 멈추고 방어를 택한 것이다. 호산은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과 새로운 고향을 받아들일 마음을 모두 준비해 놓은 채 흰 수염 노인에게 말했다.



“마지막 수입니다. 이 등대로 흑나이트를 잡으세요.”



“정말…. 그게 최선인가? 놈의 흑룩이 이렇게나 가까운데!”



호산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h6 자리에 있던 선미도 등대가 흰 수염 신의 느리면서도 단호한 손길로 c6을 향해 움직이는 동안 태양은 백 번 지고 떠올랐다. 백룩이 대장장이의 흑마를 쓰러트리고 흑킹의 두 칸 앞에 멈추어 섰다! 맞은편에서는 깊은 탄식이, 뒤편에서는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흰 수염의 신은 폭포수 같은 긴 수염을 현악기의 줄을 뜯는 것처럼 흥겹게 쓸어내렸고 흥분을 억누른 목소리로 호산과 거의 동시에 이렇게 외쳤다.



“체크 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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