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은 복숭아 씨앗을 닮은 선미도 등대의 등명기 앞에서 깨어났다. 뒤로 넘어진 탓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는 힘이 풀린 다리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디자 등대의 사무실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너머로 야외 주차장이 내다보였다. 날이 어둑하고 거리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새벽 시간인 듯했다. 호산은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애쓰며 흰 수염 노인이 등대를 엉뚱한 곳에 가져다 놓은 건 아닌지 확인했다. 역시나 그랬다…. 널찍한 주차장 왼편으로 보이는 2층짜리 하얀 건물에 ‘예천군 보건소’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반나절만에 등대가 인천에서 예천으로 움직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영감님이 진짜.”
어쩐지 흰 수염 노인이 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늘을 한번 노려본 다음 휴대폰으로 인천 집까지 돌아가는 경로를 검색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보건소의 경비원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호산과 등대를 번갈아 보았다. 핸드폰을 꺼내 드는 폼이 당장 신고를 할 것 같았다. 호산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어렵게 택시를 잡아탄 그는 곧장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광측반에게 연락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그들은 밤새 섬 주변을 수색하며 사라진 등대와 호산을 찾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는 선미도 등대가 예천 보건소 앞에 있으며 자신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리는 원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등대들이 대륙을 넘나드는 왕복 여행을 즐기는 판국이라 호산의 말이 믿어지는 이 상황이 우습다고 말했다. 호산은 그게 무슨 얘기인지 전부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피로감에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무사히 집에 도착한 호산은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지쳐있었다.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할 이세계(異世界)의 체험보다는 예천에서 인천까지 오는 5시간의 장거리 이동이 그를 더욱 지치게 만든 것 같았다. 광측 장비를 운반할 때 힘이 달렸던 것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체력을 단련할 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 하루는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지침을 원준을 통해 전달받았지만, 호산은 습관적으로 출근할 때처럼 소파에 앉아 아침 뉴스를 틀었다. 앵커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기운차고 또렷했으나 그의 귀에는 희미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빠르게 북상하던 초강력 태풍 도미노가 갑자기 소멸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잠결에도 계속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던 호산은 선미도 등대가 옮겨간 예천이 아주 개연성 없는 장소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선미도의 원위치를 기준으로 반추해볼 때 대략 그 지점이 자신이 잡은 대장장이의 흑마가 놓여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내 깊은 잠에 빠져버린 호산은 그와 연결 지을 수도 있는 기상 캐스터의 다음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한 채 또 다른 이세계인 꿈의 세계로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 괌에서 생성된 이번 태풍 도미노의 이름은 북아메리카 태풍위원회에서 제출했는데요. 우리가 블록 게임의 명칭으로만 알고 있던 이 이름이 사실 미국 역사에 남은 경주마 이름이라는 걸 아셨나요? 윤기 흐르는 검은 털 때문에 레일 위의 사신이라고도 불렸던 도미노. 초강력 태풍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경주마 대체 어디로 이탈한 걸까요? 등대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요?”
앵커가 클로징 멘트로 넘어갈 무렵. 호산은 바둑을 두는 노인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그들은 산만큼 거대하지 않았으며 그가 매일 들르는 편의점 앞에 앉아 동네 어르신들처럼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걸친 채 우유를 들이켜고 있었다. 호산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배꼽까지 흰 수염을 늘어트린 호리호리한 노인과 구릿빛 피부에 다부진 근육을 가진 노인은 길을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옆에 놓인 간이 탁자 위에 보리굴비 정식이 한상 차려져 있는 걸 발견한 호산은 '그래, 일을 마치고 원준과 먹기로 했었지'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는 중에도 굴비살 위로 구수한 냄새를 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터무니없는 조합으로 인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깨달은 호산은 노인들 쪽으로 뚜벅뚜벅 다가가더니 바둑판을 뒤엎어버렸다.
기상 캐스터의 말대로 등대와 등부표들은 모두 제 위치로 돌아갔다. 우수아이아 등대는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로, 랑카위 등대는 말레이시아의 랑카위로, 란테르나 등대는 이탈리아의 제노바로. 아이러니하게도 선미도 등대만 선미도를 이탈하여 여전히 예천에 머물러 있었다. 신들의 체스가 끝난 이상 이 등대는 사람의 힘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믿는 이 기묘한 체스판이 또 언제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느 한쪽에서 ‘내일 2시쯤 두세나!’ 하고 얘기하면 그건 2세기 후 즘이 될 수도 있었다….
같은 시간 청계천에서는 우리에게 낯이 익은 회색 게 한 마리가 정처 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란테르나 등대가 을지로 인근에 멈추어 있을 때 하선한 녀석이었다. 그는 자갈도 이끼도 없는 시멘트 바닥을 공포 속에 기어 다니다가 마침내 물을 발견하고는 전율했다. 고향의 바다와 비교하여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그는 집게발로 청계천의 수면을 두어 번 톡톡 건드린 다음 ‘퐁당’하고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