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내신 등급은 9등급으로 나눕니다. 고기도 아닌데 왜 등급을 매기냐는 학생들의 불평이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교사를 하면서 가장 속상할 때가 학생에게 성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잔인한 순간입니다. 돼지고기를 1등급, 1+등급, 1++등급으로 나누는 건 그래도 모두 1등급인데, 학생들은 9등급까지 너무 자세히 분류됩니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성적을 받아 본 학생들은 대다수 충격에 빠지고 할 말을 잃습니다. 성적 등급일 뿐인데 자신의 존재 자체가 8등급, 9등급의 가치로 떨어진 것처럼 여기는 학생도 많습니다.
특히 1학년 여름 방학식 날 성적표를 받으면 그렇습니다. 1차 지필고사까지는 점수가 나와도 등급까지 나오진 않습니다. 첫 등급을 받아 보는 시기는 2차 지필고사까지 끝난 후에 수행평가 점수가 더해져서 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입니다. 간혹 1차 지필고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아이가 몇 등급이냐고 묻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1학년 학생들도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등급을 물어봅니다. 하지만 1차 지필 평가만으로는 석차 등급을 알 수 없습니다. 성적 산출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체 과목의 등급을 묻는 학생과 부모님도 계신데, 등급은 과목별로 산출됩니다. 전체 등급으로 대학 합격 여부를 묻는 것은 편의상 말하는 것인데, 대학마다 반영하는 과목과 반영 비율이 다르므로 정확한 수치가 아닙니다.
학급 인원 기준 상대평가 등급(출처 : 네이버 블로그 장문성의 입시이야기)
이렇게 방학식 날 성적표를 받으면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학생은 1등급을 받은 4%의 학생뿐입니다. 한 반에 4명이 아닙니다. 100명 중 4명이니,우리 반 학생으로 환산한다면 학급에서 단 한 명 정도만 1등급을 받습니다. 중학교까지 우리 아이가 수학 A를 받았어요. 그런데 4등급이라니요? 우리 아이는 중학교 내내 영어 A를 받았어요. 그런데 3등급이라니, 서울에서 대학은 갈 수 있는 건가요? 학부모 상담 때 듣는 단골 멘트입니다. 학부모님은 좌절하시고 학생은 더 좌절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학생이 노력하지 않았거나 잘못한 게 없습니다. 중학교 때 A를 줄곧 받던 학생들이 비슷한 학군과 수준의 고등학교에서 1~2등급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절대평가가 상대평가로 바뀌었고, 중학교 때 A등급이었더라도 11% 바깥에서 A를 받은 학생은 당연히 3등급 바깥으로 밀리는 겁니다. 우리 반 30명이 어떻게 등급을 나눠 받는지 위의 표를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왼쪽이 등급을 산출하는 기준이고, 이를 30명 학생에게 적용한 게 오른쪽입니다.
이 표를 보시면 30명 중의 3명만 2등급까지 받습니다. 나머지 27명의 학생은 3등급 아래의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평균적인 수준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3점대 등급으로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어렵다는 것은 학생들도 압니다. (특목고는 다릅니다. 블라인드 전형을 하더라도 표준편차를 보면 일반고인지 특목고인지 구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3등급~5등급 학생들은 대다수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평가도 챙기는 성실한 학생들입니다. 2학년과 3학년이 남았으니 열심히 하면 소위 괜찮은 in 서울 대학(학벌이 취직할 때 도움이 되는 대학)을 노려볼 수 있는 애매한 등급입니다. 따라서 이 구간의 학생들은 공부 스트레스와 좌절감을 특별히 더 받습니다. 성적표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거나 시험 때마다 지나치게 긴장하는 학생들도 3~5등급에 걸쳐있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학부모님도 마찬가집니다. 1~2등급을 받는 학생은 이미 긴장 관리 능력이 있고 자기주도학습이 잘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학습 면에서 크게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습니다. 아예 6등급 아래에 있는 학생들은 솔직히 공부 욕심이 없고(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평균적인 학생들을 기준으로 볼 때 수행평가를 잘 챙기고 성실히 복습하면 5등급까지는 나옵니다) 대부분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3~5등급 학생들만큼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이미 자녀가 공부 쪽으로 재능을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다른 진로를 찾아보거나 안타깝지만 이미 성적에 해탈한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3~5등급을 받는 학생의 부모님은 학생과 똑같이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그러나 쉽게 성적이 오르지 않는 현실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왜 옆집 아이는 1, 2등급 받는다는데 우리 아이는 노력해도 3, 4등급일까 속상해서 아이를 끊임없이 다그치게 됩니다.
조금만 하면 성적이 오를 것 같은 이 친구들,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우선 학생 스스로 받는 스트레스를 이해하고 격려하셔야 합니다. 본인도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엄마까지 맨날 성적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더 위축되고 긴장합니다. 끝까지 열심히 하면 2, 3학년 때 성적이 오른다고 격려해 주시고, 성적이 안 오르더라도 너는 참 소중한 존재라는 당연하고 오글거리는 멘트도 의식적으로 날려주시면서 응원하셔야 합니다. 성적보다 우리 아이의 존재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랐으면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고등학교에 오는 순간 다른 무엇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원하는 건 아니시죠? 격려하고 또 격려하시는 게 부모의 할 일입니다.
이 등급의 학생들은 외부 도움을 받아 성적이 향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취약한 과목만 학원을 보내는 것도 방법입니다. (3~5등급 학생들이 학원 효과를 볼 수 있는 가장 적정한 수준입니다. 1~2등급은 혼자 해도 됩니다. 모르는 내용만 인강으로 확인하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6~9등급은 성실함이 부족해서 학원도 큰 도움이 안 됩니다. 학원에 가도 수준별 수업이 아니라면 전기세만 내주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6등급 이하의 등급을 받는다는 건 공부 방향이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차라리 학생 수준에 맞게 기초 향상을 위한 과외지도를 받거나 학원 갈 시간에 학교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편이 낫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면 인터넷 강의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학습 의지가 있는 학생은 학원을 오가는 시간을 아껴 인강을 듣는 게 더 효율적인 전략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도 현실은 30명 중 3명을 제외하면 모두 3등급 아래의 등급을 받게 됩니다.
엄마들 30명을 모아 놓고 가장 좋은 엄마 3명에게 표창을 한다고 상상해 본다면 저는 죽어도 3명 안에 들지 못한다고 확신합니다. 30명을 가위바위보 시켜서 3명에게만 선물을 준다고 해도 저는 그 안에 들지 못할 겁니다. 그만큼 어려운 게임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 냉혹한 현실에서 경쟁해야 하고, 잔인할 만큼 정확한 수치를 매 학기 받아야 합니다. 경쟁에 내몰린 자녀의 현실은 바꿀 수 없지만, 격려하고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자녀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시고 장점을 찾아 칭찬해 주는 게 여전히 가장 중요한 엄마의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