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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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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Jul 04. 2023

갱년기 랩소디

나만 빼고 다들 잘 사는 것 같은 오십하나.


 시간이 많을 때는 꼭 몸이 아프고,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열정이 폭발할 때는 시간이 없다. 시간도 있고 열정도 충만할 때는 꼭 발목을 잡는 사건들이 터지더라.



오십 년을 넘게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은 많았으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늘 해왔던 비겁한 변명들이다.




아주 가끔 남편과 술 한잔 기울일 때면 꼭 처음 하는 질문처럼 내가 매번 남편에게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몇 살로 돌아가고 싶어?"


진짜 남편의 생각이 궁금한 게 아니라,


"내가 만약 과거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블라블라~~"


라고 하면서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싶어지는 나의 주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그널인 것이다.


돈얘기나 사업얘기 말고 그나마 사이가 좋을 때 주로 나오는 나의 주사 테마인데, 이제 남편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면서도 '그래 그래 그렇구나' 하며 들어주는 척 졸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꾸벅꾸벅 조는 남편을 보며, 술기운인지 우주의 기운인지 뭔지 모를 기운들을 끌어 모아 주문을 외운다.


"나는 꼭 다시 태어날 거야, 꼭 다시 태어날 거야, 그때는 내 발목을 잡는 부모고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필요 없어!! 나만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거야. 멋지게 살 거야!!!"


누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했나. 누가 들으면 부모, 남편, 자식에게 퍽이나 큰 희생 하느라 저 하고 싶은 일 하나 제대로 못하게 한 줄 알겠네. 바로 이 지점이 내가 이번 생에 아주 억울한 부분이다. 차라리 부모 위해, 남편 위해, 자식 위해 내 꿈도 미래도 포기한 채 이 한 몸 부서져라 살았으면 효부, 열녀, 현모양처 소리라도 들었을 텐데. 정작 마음 쓰고 애태우고 돈도 수억 깨진 것 같은데, 이 한 몸 부서져라 바치지 않은 탓인가. 지금의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다.


할 도리 할 만큼 했다 생각했는데 부모한테는 불효자식이 되어 있고, 남편에게는 헌신하다 헌신짝 돼서 두 번째 결혼을 했고, 그 귀한 자식에게는 마음과 달리 늘 짜증뿐인 갱년기 아줌마가 되어있다. 아니, 내 삶을 포기했으면 가족에게 인정이라도 받던가 가족에게 인정 못 받을 것 같았으면 하고 싶은 일이나 실컷 하고 살던가.  10을 하나 90을 하나, 어차피 100이 아니면 가족에게 그저 그런 존재로 남는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냥 그 100을 나에게나 다 쓸걸. 그냥 독한 년 소리 듣고 버젓이 잘난 딸 돼서 자랑스럽게 나타 날 걸.


100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 밖에 모르는 딸, 이기적인 큰 언니"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오십이 돼서야 나는 진짜 그런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산 지난 50년을 돌이켜보면 나에게 "자아"라는 게 있기는 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사춘기의 "나" 보다 부부싸움 하는 부모에게 더 마음 썼을까?  

나는 왜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바람피우는 남편 때문에 늘 불안했던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까?

나는 왜 아이의 미래를 보장하지도 못하면서 일보다는 아이의 옆에 머물기를 선택하는가?

나는 왜 인생의 중심에 나를 놓는 경험을 회피했을까?


가정불화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이 때문에,

늘 핑계 대고 변명하는 게 습관이 되었나?


남들은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선택하던데.  멋지게 전문직 여성으로, 당당하게 일도 육아도 경제적 성공도 다 이루어 낸 사람들을 보면 나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만다. 그녀들이 가진 멋진 집이나 차, 통장 잔고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나"를 먼저 선택했다는 것이다. 애달픈 부모나 남편이나 자식이 아니라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일찍 알았다는 것이 부럽다. 결국은 인생의 모든 순간순간 나의 결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니 누구를 원망하고 말 것도 없이 그저 어리고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만 남는다.


어느 순간,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거야"라는 근거 없는 긍정의 격려들이 영혼 없는 메아리처럼 허공에 흩어진다. 위로가 안된다. 너무 과한 비약이라고, 갱년기 우울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호르몬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지난 50년을 잘 싸매서 보내버리고 새로운 50년을 맞으려면 어느 때보다 객관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한 듯하다. 늘 앞으로 50년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 또한 근거 없는 기대수명이라 30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미래지만, 지금까지의 선택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 좀 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선택. 그 결과는 보다 더 이타적이기를 바라는 선택.


갱년기를 핑계 삼아 철이 늦게 드는 걸 감추고 싶은 걸까? 사춘기때 했어야 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제야 하는 걸 보니 내 인생은 '이제부터 제대로'라는 생각이 든다.





<에필로그>


"그뤠~ 그뤠~ 당신 마음 다 알아~~ 딸꾹~~"

 하며 졸기 시작하는 남편을 흔들어 깨우며 꽐라 어조로 나는 말한다.


"다시 태어나면, 부모가 싸우든지 말든지 난 공부하러 도서관에 갈 거야!!!"


"다시 태어나면, 바람피우는 남편새끼 지켜보겠다고 나를 갉아먹는 미련한 짓 따위는 안 하고 얼른 짐 싸서 떠날 거야. 프랑스로 학위 받으러 갈 거야. 하고 싶던 건축사, 미술사 공부 실컷 하며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야!!"


"다시 태어나면..... 아이는 절대... 아이는... 아이는 낳고 싶네. 둘은 낳고 싶네. ㅋㅋㅋ 그러면 또 하고 싶은 거 죄다 다음 생으로 미뤄야 하는 거야???  그래, 그럼 다음 생은 양처는 포기하고 현모로 살아보지 뭐. 드르렁드르렁 ZZZZ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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